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인간의 위대한 집념
돌을 캐내고 땅을 고르고, 돈이 생길 때마다 묘목을 사다 심는 일. 대체 언제쯤 돈을 만져볼 수 있을까 싶은 막막한 나날이 있었다. “아버지, 과수원이 제 자리를 잡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한 10년은 족히 걸렸지.”
나무는 심는다고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부단히 가꾸고 정성을 쏟아야만 비로소 멋진 과실수가 된다. 세상에 정성 없이 되는 일이 무엇이겠냐마는, 그중에서도 과수원은 가장 긴 호흡의 투자가 필요한 일이다. 열매가 맺힌 뒤에도 해마다 쏟아야 하는 정성은 자식을 키우는 일과 꼭 닮아 있었다.
과일이 돈이 되기 전까지, 부모님은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양계장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현금 흐름을 만들기 위한 ‘투자’였던 셈이다. 닭은 생육 기간이 짧고 정기적으로 알을 낳아주어 든든한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어머니는 그때의 고마움 때문인지 지금도 소일거리로 닭장을 정성껏 돌보고 계신다.
나의 기억 속의 우리 집은 늘 울창한 과수원이었기에, 그곳이 원래 돌밭이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듯 부모님의 지난날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엄마는 가끔 그 시절의 고생담을 들려주시곤 한다. 시내 시장까지 계란 꾸러미를 손수레에 싣고 한참을 걷던 이야기, 눈이 오면 머리에 이고 배달을 가던 눈물겨운 이야기들 말이다. 가다 넘어져도 내 몸보다 계란이 깨졌을까 봐 먼저 살폈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마음이 아려왔다.
계란 한 판이 500원인데 우동 한 그릇이 500원이라 차마 사 드시지 못했다는 이야기. 배는 고프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자식들이 걱정되어 발길을 서둘렀던 30대의 젊은 우리 엄마! 그 책임감이 지금의 우리를 키워낸 동력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부모님께도 기회가 찾아왔다. 일반 계란보다 세 배나 비싼 '종란(부화용 계란)' 사업에 성공하신 것이다. 수완 좋은 엄마의 정성 덕분에 집을 수리하고 소도 사고 논도 살 수 있었다. 그 성공 이후 주변에도 양계 붐이 일어 농가 소득이 올라가기도 했다.
우리 집 일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그 시절엔 '품앗이' 문화로 이웃의 일도 거들어야 했다. 엄마는 특유의 인심과 사교성으로 동네 아주머니들과 깊은 유대를 쌓으셨고, 아버지는 마을의 리더로서 역할을 다하셨다. 과일나무가 자라는 데 시간이 걸리듯, 사람 사이의 신뢰가 쌓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낯선 외지인에서 진정한 이웃사촌으로 스며든 과정은 그 자체로 부모님이 얼마나 참된 삶을 사셨는지를 증명한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은 신만이 하는 일이 아니다. 황무지 돌밭을 비옥한 옥토로 바꾸고 주렁주렁 열린 과일을 보며 느끼는 희열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인내의 열매는 달았다. 과수원이 안정을 찾은 후 부모님은 양계 일을 뒤로하고 비로소 꿈꾸던 과수원 일에 온전히 몰입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