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단 하나의 꿈, 과수원
아버지는 1941년 음력 3월 2일, 충청도 두마면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세상에 나오셨을 때, 이미 가족들은 만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였다.
늦둥이로 자란 아버지는 부모님의 엄격한 훈육보다는 너른 사랑, 혹은 적당한 무심함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하신 듯하다. 막내였지만 고집이 세고,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셨다.
만약 그런 고집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가난이 죄가 되어 자식의 배움조차 희생시켜야 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아마 학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강한 고집은 훗날 성공을 일구어낸 가장 단단한 밑바탕이었다.
어렵사리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가던 어느 날, 경주 불국사로 떠난 수학여행에서 아버지의 인생을 바꾼 일대 1950년대는 과일이 더없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과수원을 경영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수학여행 중 마주한 사과밭의 달콤한 향기는 소년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너무나 먹고 싶었지만 돈 없는 학생들에게 사과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바로 그때, “과수원은 돈이 되고 미래가 보장된 일”이라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아버지의 심장에 깊이 박혔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단단히 결심하셨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반드시 과수원을 하겠다.’ 어린 나이에 세운 장래 희망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뒤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셨다.
졸업 후 괜찮은 직장에 취업할 기회가 찾아와도 “나는 꿈이 있어 안 된다”며 단칼에 거절하셨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첫 꿈이 평생의 소명이 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수원은 마음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넓은 땅이 필요했고, 전문적인 농사 기술도 없었다.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돕는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고향 충청도에는 땅값이 싸면서도 넓은 평지가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아버지 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머무는 강릉의 절 근처에 아주 넓은 평지가 있으니 와서 보지 않겠느냐.”
지금은 서울에서 강릉까지 버스로 3시간 남짓이면 도착하지만, 1960년대는 고속버스로 8시간 이상을 달려야 했다. 길이 얼마나 험했던지 아버지는 “여덟 시간을 넘게 버스 타고 강릉에 내리니 바지가 다 따게 져 버렸어(터졌어)”라고 회상하시곤 했다. 비포장도로의 상태가 워낙 나빠, 버스가 마치 놀이기구처럼 요동쳤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오직 꿈 하나만을 이정표 삼아 강릉으로 향했고, 마침내 2만 평의 광활한 대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오롯이 땅 하나만 보고 꿈을 찾아 떠난 부모님 덕분에, 우리 가족은 강릉을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되었다.
아버지의 꿈이 과수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 더 큰 세상을 알아갈수록 강원도 시골이 참 싫었다.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탈출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강릉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집이 과수원’이라고 하면 다들 눈을 반짝이며 부러워하곤 한다.
이제는 나의 고향이 강릉이 아닌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부모님 또한 마찬가지다. 태어난 고향 충청도가 아닌, 평생을 일군 이곳 강릉에 묻히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가족에게 강릉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우리 존재의 뿌리와도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