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최고의 파트너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80년 만의 중간 정산, '생에서 가장 중요한 1순위는 배우자'

by 디지로그마담앤

그 시절 흔한 일처럼 부모님은 중매로 결혼하셨다. 아버지는 엄마와의 처음 만남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앞으로 과수원을 할 거라 땅을 샀어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많이 고생해야 하는 데 성공을 하면 세계 구경을 시켜 줄게요.”라고 약속을 하셨다. 씩씩한 엄마는 “그럴게요.”라고 수줍게 약속하고 두 분은 그렇게 결혼을 하셨다.


외갓집도 딸부자라 둘째 딸인 엄마도 그렇게 외할머니 손에 괜찮은 집안을 찾아 혼사를 치른듯했다. 아버지를 처음 본 엄마의 기억은 이랬다. “너무 말랐고 눈빛은 강했어”. 옛날에는 고향을 떠나 친인척도 없는 곳에서 산다는 자체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위해 떠난다지만 엄마는 친정 식구 하나 없는 오지마을 같은 강릉으로 신랑만 믿고 간다는 건 크나큰 모험이었다.


아버지가 강릉에 땅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땅값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강원도 땅값이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저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막내아들을 따라 함께 내려오시게 되었다. 큰아들이 스님이 되어 사실상 모실 분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나이가 많은 시부모님과 성질이 까다로운 같은 남편 그리고 앞으로 직접 개간해야 할 황무지 땅.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과수원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시며 마음이 무거우셨다고 한다. 그 땅은 황무지라 돌밭이나 다름이 없었다. 2만 평을 돌부터 정리하며 시작해야 한다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막막하셨을까? 아버지는 말씀 중 갑자기 엄지를 위로 올리시더니 “난 새벽 엄지가 보일 즈음 나가 일을 시작해 엄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가서 일했어.” 형체가 보이는 빛이 있을 때는 종일 바깥일을 하셨다는 의미다.


농기구도 변변치 않고 젊은 혈기로 아버지와 엄마는 그렇게 맨손으로 황무지 같은 땅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이사 온 젊은 부부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 오래는 못살고 이 동네를 떠날 거야.” 타지에서 건너온 젊은 부부에게 이웃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마음 나눌 이웃도 없고 넓은 땅을 개척해야 했던 부모님님께서는 그야말로 앞만 보며 열심히 정말 최선을 다해 사셨다.


사실 아버지보다 엄마가 훨씬 힘이 더 좋으셨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너무 마르셨고 소위 입도 짧은 편이셨다. 반면 엄마는 덩치가 좋으시고 피곤한 모습도 없이 아침만 되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모든 일을 일사천리 하시는 모습만 남아 있다. 아버지는 늘 고된 모습 그리고 건강이 늘 좋지 않으셔서 자식들 우리에게조차 자주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아버지만큼 엄마도 똑같이 바깥일을 도왔고 많은 자녀(1남 5녀)도 키워 내며 시부모 봉양까지 하며 조력자 역할을 해냈기에 아버지가 버틸 수 있었다. 두 분은 성향이 매우 다르지만 서로 다른 부분을 채울 수 있어 비즈니스 관계로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물론 부부로서 뜻이 맞지 않아 자주 싸우셨지만 일적으로 봤을 때 궁합이 딱 맞았다. 큰 꿈을 꾸고 틀을 잡는 건 아버지의 역할이었고 나머지 실질적인 일들은 엄마가 채워 나가셨다.


아버지도 응석받이 막내셨는데 막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기댈 곳이 없이 처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던 분이셨다. 50년이 넘게 함께 과수원 일을 하셨다지만 아버지가 엄마에 대한 칭찬은 아주 소박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가장의 역할과 무게 때문이었다. 가끔 “엄마는 시장에서 물건을 잘 팔아. 그리고 누가 가져갔는지 기억력이 정확해”. 이 정도의 칭찬이었다. 마치 아버지는 사장이고 엄마는 그 아래 직원처럼 말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80을 훌쩍 넘기며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마주하며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버지, 살아오시면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던가요?”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1순위는 배우자야.” 나는 순간 놀랐다. 언제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과수원을 일구워 낸 자신의 업적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엄마가 없었으면 이 과수원을 나는 못했어. 엄마가 있었기에 내가 이 이 과수원을 할 수 있었어.”


옆에 계시던 엄마도 흠칫 놀란 표정이셨다. 아버지는 그 시대 다른 분들보다 열린 사고를 하셨지만 어쩔 수 없이 순위는 아버지 다음 엄마였다. 그런 아버지가 지난 세월 업적을 엄마의 공으로 돌리자 내심 엄마도 좋아하셨다. 물론 긴 세월 부부가 눈만 뜨면 일하기 바쁜 삶에서 중간 정산할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고 남은 인생을 강제로 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그 정산의 시간이 조금 더 빨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병원에 입원을 반복하며 아버지도 이제는 마음이 달라지셨다. 엄마도 다 안다는 듯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는 게 안타까웠다. 휠체어에 앉아 아버지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집은 별일은 없고?” 하시며 엄마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으셨다. 그 의미는 ‘당신은 나의 가장 훌륭한 배우자이자 나의 전부인 과수원을 만든 최고의 파트너였습니다. 같이 고생해 줘서 고마워요’라는 의미로 보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애잔함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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