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에게 매년 쌀 백 가마를 보냈던 할아버지의 놀라운 이야기
“우리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도우셨다고요?” “그럼. 할아버지가 만주 한인촌 대표로 계실 때, 매년 쌀 백 가마니를 안중근 의사께 드렸지.” “우리 아버지는 ‘연계 선생’이라 불리셨어. 중국 만주 역사기록관에도 그 성함이 남아 있다는 걸 큰형님이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셨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마주한 이야기는 믿기 힘들 만큼 방대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우리 가족의 과거에는 신기하고도 숭고한 기록들이 가득했다.
광복절 무렵, 독립운동 관련 프로그램에 안중근 의사가 나오면 아버지는 늘 친근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만주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말이다. 그저 성씨가 같은 안 씨라 내심 반가워서 하시는 말씀이겠거니 짐작했을 뿐, 굳이 그 내막을 묻지 않았다. 나에게 그 시절은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한복을 입고 방에 조용히 앉아 계시던 모습, 가끔 부엌에서 불을 때던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눈길 정도다. 예닐곱 살 무렵 돌아가셨기에 내 머릿속엔 ‘노인’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만이 남아 있었다. 가끔 어머니가 회상하는 ‘시아버님’의 모습 또한 치매로 인해 정갈하지 못했던 노년의 그림자가 전부였다.
아버지에게는 스무 살 차이가 나는 큰형님, 즉 나에게는 큰아버지가 계셨다. 생전 유명한 스님이셨던 큰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역사를 소중히 기록한 자서전을 남기셨다. 그 책의 존재는 알았지만, 단 한 번도 읽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름 X세대를 자처하던 나에게 조상의 업적이나 과거는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알아서 뭐 하나 싶은, 평범한 현실적인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생애를 기록하며 큰아버지의 자서전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게 펼쳐진 책장은 마치 나를 100여 년 전의 과거로 안내하는 문과 같았다.
1920년대, 일제의 침탈과 패악질이 심해 더는 조선 땅에서 살기 힘들다는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당시의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셨다. 그리고 뜻이 맞는 이웃들을 모아 만주 이민을 결심하셨다.
그야말로 ‘만주 이민 1세대’였던 셈이다. 할아버지를 믿고 따르던 이웃이 무려 50여 가구나 모였다. 그들은 조용히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고국을 떠나 낯선 땅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는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을 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척박한 땅. 여인숙에 보따리를 풀고 정착을 고민해야 했던 리더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내가 기억하던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이토록 용감하고 리더십 넘치는 선구자였다니. 책을 읽을수록 할아버지를 그저 볼품없는 노인으로만 기억했던 내 자신이 미안해졌다.
만주의 추위 속에서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이 길어지자, 함께 떠나온 이들 사이에서 원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극적인 우연이 찾아왔다. 먼저 만주에 정착해 자리를 잡았던 어느 조선인 가족이 하얀 옷을 입은 무리가 여인숙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타국 땅에서 '흰 옷 입은 조선인'이라는 존재만으로도 서로를 얼싸안고 서럽게 울었다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큰아버지의 책을 읽고 난 뒤 아버지께 직접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아버지는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셨다. 말씀을 이어가던 아버지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들었고, 나 역시 묘한 뭉클함을 느꼈다. 3대의 혼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는 결국 척박한 만주 땅에 쌀농사를 성공시켰다.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했던 쌀농사 기술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땅을 빌려준 성주도 조선인들을 인정했고, 할아버지는 한인촌의 대표가 되셨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한인촌은 번성했고 더 많은 동포가 이주해 왔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남녀 차별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새로운 규칙을 만드셨다. 타지에서의 삶이 조금 더 유연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엄격했던 유교적 사상의 틀을 과감히 깨신 것이다.
안정적인 부를 일구게 된 뒤에도 고국에 대한 애끓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안중근 의사와 연이 닿았고, 독립자금을 후원하기에 이르렀다. 매년 쌀 백 가마니를 보냈다는 기록은 당시 농사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영화 <영웅>이 개봉할 무렵, 나는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 안중근 의사 영화가 나왔는데 보러 가실래요?” “참, 아버지 극장엔 언제 가보셨어요?” “20대 시절, 종로에서 본 게 마지막인 것 같네.”
아버지는 과수원을 시작한 뒤로 모든 여가 생활을 접고 사셨다. 외출을 번거로워하시던 분이 웬일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 3대가 나란히 앉아 50년 만에 극장 나들이를 했다.
아버지는 두 시간 내내 무서운 집중력으로 영화에 몰입하셨다. 일본군의 만행이 나올 때마다 “이 나쁜 놈들!”이라며 수시로 호통을 치시는 바람에 주변의 눈총을 사기도 했지만, 그 당황스러웠던 순간조차 이제는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100년이라는 시간의 스펙트럼 안에서 무수한 사건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내 삶의 시간만이 가치 있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사실 그 모든 순간이 핏줄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억지로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조상의 빛나는 얼을 오늘에 되살려...”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우리는 조상의 DNA, 즉 육체와 영혼을 공유하는 존재다. 거친 황무지를 개척했던 할아버지의 피는 아들인 우리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