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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Jun 02. 2023

너의 이름은

가슴 벅차게 찾고 있는 그것은

오늘도 고된 하루였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문제의 해결책 찾기. 곳곳마다 보이지 않던 함정들이 있어서 일의 진행이 매끄럽지 않다. 마치 무언가 지독한 것에 저주받은 것 같이, 일하다가 한숨이 푹푹 쉬어진다. 삶은 고되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단련시키고 있는 건, 이 삶에서 무엇인가 깨달으라고 채근하고 있다. 일이 그것을 대신할 수 없는데. 일하다가 가끔 삶의 새로운 단면들이 보이는 건 아이러니일까?


그리하여 저녁을 사러 나갈 겸 해서 오랜만에 밤 산책을 나섰다. 역시나 오랜만에 내린 비로 모처럼 선선한 공기 속이다. 나무들은 변함없이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 근처의 공원. 이 공원이 좋아서 나는, 1년 반 전에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왔더랬다. 산란한 마음을 조용히 시키기에 조용히 풍경을 보면서 걷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복잡하고 시끄러웠던 마음이 가라앉고, 조금씩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 어두운 곳에 길 따라 켜져 있는 불빛, 간간히 뛰거나 걷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당연한 듯 혼자서 걷고 있었다.


문득 1년쯤 전에 이곳을 함께 걷던 그 녀석이 생각났다. 억센 사투리마저 귀엽게 들렸던 영어 말투.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듣던 아이. 감정에는 참 아둔한 나는, 그 사람의 호감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알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국적을 떠나서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많이 웃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정확히는 이혼하고 5년 동안, 나는 내 마음속에 들어오려는 누군가를 막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연애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고 자위하면서. 그렇다고 간간히 썸 타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 사람을 좋아하고, 만나다가, 헤어지는 과정 혹은, 그 사람에게 데어 상처받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했었나 보다.


처음 이혼하고 진지하게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있었다. 겉으로는 좋아 보이던 성격 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결함을 알게 되고는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었다. 그는 한 사람에게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좋아지고 있음을 알고, 동시에 그의 성격을 알고 난 어느 날, 나는 셰어하우스의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고 나자, 내게 상처 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나선 그런 상처를 준 사람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회사 동료랑 잠시 연애를 했었다. 서로는 참 빠르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전혀 다른 부서였으나 가끔 회사에서 마주치면 환하게 웃었던 내 모습을 보고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내 상사는 빙그레 웃었던 것 같다. 그를 알고, 그의 배경과 성장 환경을 알게 되고, 이혼 후 아이가 있음을 알게 되고 나서 난 고민에 빠졌다. 그 아이를 받아들이는 건 내 몫이 아니라, 반대였다. 그 아이가 나를 받아들여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였다. 불우한 성장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기에 아이 사랑은 지극했다. 그를 돌봐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만 봐도 콸콸 눈물이 나는 시기를 잠시 보내고 나서, 나는 그 손을 놓았다. 그도 역시, 내가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없는 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감정이 말랑해져 있었던 시간 동안, 평소라면 이 악물고 버텼을 일의 스트레스마저도, 길을 걷다가 날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결심했던 것 같다. 연애 따위, 먹고사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퇴사를 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락다운을 거치면서, 같은 집안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만날 수도 없는 나날들이 있었다. 셰어 하우스에 새로 이사 온 청년은 나와 오래 같이 일한 고객사의 직원이었다. 한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다 보니 같이 장을 보고 밥 해 먹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도 종종 마셨다. 나는 이때에도 사실 연애를 할 생각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몇 달 후 그는 이사를 나갔고, 나는 버텼다. 며칠 전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그는 올 겨울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다정하고 배려심 있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마음이 기뻤다.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어도 한때는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고 공감했던 사람이 밝은 모습으로 웃는 걸 보는 건 참 좋은 기분이었다. 과연 나는, 지금, 과거의 누군가 나를 본다면, 그런 모습일까?


어제 있었던 모임에서 과거에 내게 잘해주었던 선배와 잘 알고 지낸다는, 학교 후배를 만났다. 참 세상은 좁다. 해외에 살아도 몇 다리 건너면 이렇게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어진다는 건. 요즘 들어 부쩍 나는, 업보나 인연에 대해 생각하고, 전생이나 현생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본다. 일에 팔려 기록도, 자성의 시간도 없었으나, 내게 이런 계기를 준 건 역시나 오래 알고 지낸 고객사의 한 여자분이었다. 그녀도 나도, 각자의 위치에서 참 많은 사람들과 협업을 하며 산다. 가끔 미팅을 하러 가면, 일 얘기 이외에 불교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는 대만에 가면 자신의 전생은 거기서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곳이 좋다고 했다. 이번 주에 만나 몇 년 동안 알고 나서 두 번째 점심 식사를 하며 우리는, 지금 이 생의 숙제를 마치지 않으면 다음 생에서 또 같은 일을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은 절대로 내 인생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지는 않는 수단일 뿐이라며, 너 자신의 마음을 잘 챙기라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이번 생에서 겪어야 할 일들과 만나야 할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고. 우리 모두 잘 아는 말이지만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고, 인연이 다하면 또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면서.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 되면 절대로 다시 만나 지지 않고, 인연이 아직 남아있으면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다. 삶은 참,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40년 살면서 내가 겪은 일들과 만나고 헤어졌던 모든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나인 것은 사실이니. 그녀와 헤어져 다음 미팅을 가는데 이 말들이 깊게 남아 마음속을 맴돌았다.


주변 사람들에 감사하면서 지내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마음 깊이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듯하다. 내 행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남을 챙긴다. 내 전생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걸까?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마음속에 여전히 어디엔가 있을 내 짝을 찾는 마음은 간절하면서.


걷고 또 걷는 산책길 마음 한편이 먹먹했다. 집에 돌아와서 포장해 온 샐러드를 먹으면서 '너의 이름은'이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다. 감독의 세계관 역시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는 이야기. 재난 속에서 사람들을 살리려는 이야기를 보며 마음이 뭉클했지만, 결국 '소중한 것'을 찾아나가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의 나에게 다시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하고 있다.


쉽게 잠들수 없는 밤. 내 마음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삶의 선택들을 해왔다면, 나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꿈 속에서라도 일견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결정을 하고 싶다. 내 마음이 가장 편안하고,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삶의 결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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