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린 Apr 17. 2023

2년 준비한 통역대학원, 한 달 만에 그만둔 이유


이미지출처:Adobe Stock


언어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은 동시통역사를 꿈꿀 것이다. 중국어를 전공한 나도 대학시절 꿈꾸었던 일이다. 동시통역사가 되려면 통역대학원을 졸업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당시 대학원에 갈 형편도 아이 었고 그럴 강단도 없어 졸업 후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1년간 육아휴직을 했다. 그 당시에는(10여 년 전) 육아휴직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아 쉽게 할 수 없었다. 한 번의 거절 끝에 재신청한 결과 1년의 육아휴직을 쟁취할 수 있었다.


휴직을 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니 남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이를 낳아보니 워킹맘으로 일반 회사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힘든 일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시절 꿈꿔왔던 통역대학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학원에 다니며 통역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통대입학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경쟁이 치열하다.(10여 년 전 일이니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혼자 준비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강남에 있는 학원까지 왔다 갔다 왕복 두 시간이 넘었고 학원 수업 후에는 스터디도 해야 했다. 그렇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통대 입시 준비를 했다.


힘들었지만 할만했다. 그런데 언어공부를 너무 많이 쉰 탓 인지 1년 준비하고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복직날짜가 다가오자 고민이 되었다. 복직을 할 것인가 퇴직하고 통대준비를 더 해볼 것인가. 아이가 아직 어린데 복직하고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히 없었다. 결국엔 퇴직하기로 결심했다. 1년을 더 공부하고 가까스로 통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2년을 준비한 결과였다.


걱정반 설렘반으로 3월을 맞았다. 입학한 해 아이는 5살이었다. 가정 어린이집에서 큰 어린이집으로 옮겼던 터라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고 아침저녁으로 돌봄 공백이 생겼지만 아이 친구 엄마가 돌봐주겠다고 해 비용을 드리고 아이를 맡겼다.


입학 후엔 정말 행복했다. 좋은 수업을 들으며 원하던 통역사의 꿈에 한 발 다가간 듯해서 너무 기뻤다. 결코 쉬운 수업도 아니었고 과제도 많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즐겁게 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이는 아침마다 친구집에 보냈고 어린이집이 끝나고 나서는 엄마가 올 때까지 친구집에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침에 친구집으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울고불고 안 가겠다는 날도 많아서 아침마다 떼어놓고 학교 가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바뀐 환경 탓이겠지.. 적응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이집 원장님께서 아이가 너무 운다고 전화를 하시기도 했고 눈을 깜빡이는 틱도 심해졌다. 하루하루 학교에는 나가고 있었지만 이대로 아이를 계속 두어도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걱정되는 마음에 두 세 계단씩 급히 오르며 그 집에 들어가 보니 (문이 열려있던 건지 아이 친구가 열어주었는지 잘 생각이 나진 않지만) 아이는 울고 있었고 아이친구 엄마는 그러든지 말든지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계속 울어 마냥 달래줄 수만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나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아이가 너무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냥 잘 있겠거나 나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질상 낯선 환경에 예민하고 적응을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바로 다음날 휴학을 결정하고 휴학신청서를 냈다. 동기 언니는 아이한테 너무 휘둘리면 안 된다며 휴학을 만류했지만 아이가 잘못되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결국 한 달 만에 학교생활을 접었다. 휴학을 하고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린이집에서도 일찍 데려와 매일 두 시간씩 놀이터에서 놀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정말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매일 아침 울면서 어린이집에 가던 아이가 웃으며 가기 시작했고 틱도 좋아졌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같은 아이가 맞냐며 놀라워하셨다. 나는 1년 정도 아이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고 그다음 해에는 복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째가 찾아왔다. 그다음 해에는 복학을 하는 대신 출산을 했고 아이가 둘이 되니 학교에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3년 후 육아휴학이 끝나고 나서 자퇴를 했다.


대학원을 자퇴했으니 동시통역사의 꿈은 물 건너갔지만 통번역사의 꿈은 놓지 못해 번역학원 같은 곳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들로 공부는 그만두었고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며 이제까지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전업주부가 되니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바닥을 친 자존감은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듯하다.


지금도 한 번씩 생각해 본다. 내가 그때 대학원을 계속 다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내 꿈보다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내 꿈을 이루는 것보다 아이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그래야 나도 행복할 것 같았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생애주기별로 우선순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20대의 우선순위는 공부와 취업이었고 30대에는 육아였다. 40대인 지금은 다시 나에게 집중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초등 1학년, 엄마모임 안 하면 좋은 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