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유락에서 진행하는 모각글 시즌 5에 참여하며 쓴 글입니다

by 수빈

지금은 다 잊힌 어릴 적 기억의 군데군데에는 늘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쓰던 잔상이 비친다. 글쓰기에 대한 첫 기억은 아주 어릴 적, 엄마가 좋아하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속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한 변론문이었다. 나는 당시 혁명 세력을 이끌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인 로베스피에르를 규탄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죄목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열의 넘치는 글을 써 내려갔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세상과 맞서는 최초의 문장이었다.


내가 글을 꽤 잘 쓴다고 착각했던 때도 있었다. 할머니는 국어 교사였고, 엄마도 아빠도 글을 쓰는 무언가를 했기에, 자아가 자리 잡은 후에는 글쓰기가 마치 내가 당연히 이어가야 할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몇 차례 상을 받으면서 나는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고, 내 재능을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 시기를 지나면서 다른 관심사들에 덮여 금세 희미해졌다.


돌이켜보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분명히 있는 문장들이 입 밖으로 나오면 늘 불안했고, 금세 흩어졌다. 그래서 글을 먼저 써야 했다. 글로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말을 잇고, 누군가와 마주할 수 있었다. 글을 쓰면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고, 그제야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글은 늘 내 안의 질서를 세우는 방식이기도 했다.


취미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채 마음속 구석에만 남아 있던 글쓰기는, 내가 어릴 적 꿈꾸던 에디터로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블로그를 열었고, 브런치를 만들었다. 그 시절 나는 업계 선배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부딪히며 처음으로 ‘글맛’이라는 것을 배웠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넘쳤지만, 그만큼 글은 점점 무거워졌고, 즐거움과 의무 사이에서 흔들렸다. 시간이 갈수록 매너리즘의 늪에 더 깊고 빠르게 잠겨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남의 이야기는 곧잘 풀어내면서도 정작 내 이야기는 꼭꼭 감춰 두었다. 숙명처럼 여겨졌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며 퇴색했고, 남은 건 숙제의 무게뿐이었다. 나와 글쓰기의 실타래는 느슨하게 얽혀 늘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래도 그 실타래는 끝내 끊어지지 않았다. 돌고 돌아도 결국 내 손끝에 감겨 오는 것, 그것이 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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