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츠신, 삼체

by Arborepeary is elsewhere

1부: 삼체 문제


19

그날 밤, 왕먀오는 서재에 앉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 사진을 보았다. 그의 눈길은 만리장성 이북의 눈 덮인 황량한 산골짜기에 머물러 있었다. 절반은 뽕나무인 고목들이 사진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왕먀오는 머릿속에 맴돌던 그림자를 화면에 중첩시켜 그녀를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놓았다. 그녀는 아주 작았다. 그러자 마치 사진 속 세상이 그 그림자를 알아보는 듯, 이 모든 것이 마치 그녀를 위해 존재해왔다는 듯, 화면 전체가 살아 움직였다. 그는 다시 그녀의 그림자를 다른 사진에 대어보았다. 때로는 그녀의 두 눈을 사진 속 끝없는 창공의 배경으로 삼았다. 그러면 그 화면 역시 살아 움직이면서 왕먀오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펼쳐졌다. 왕먀오는 늘 자신의 사진 작품에 영혼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는 결여된 것이 바로 그녀였다는 것을 알았다.


21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모두 하나의 결과를 향하고 있다. 물리학은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것은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22

이론 모델은 갈수록 복잡하고 모호하며 불확실해져 실험으로 증명하는 것 역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물리학이 거대한 장벽에 부딪혔음을 의미한다. ‘과학의 경계’는 새로운 사고의 길을 열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과학적 방법으로 과학의 한계성을 찾고, 과학이 자연계를 인식함에 있어 깊이와 정확도상의 한계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 너머는 과학이 진입할 수 없다. 현대물리학은 어렴풋하게나마 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27

“그렇다면 교수님의 삶은 일종의 우연입니다. 세상에 변화무쌍한 요소가 이렇게 많은데 교수님의 인생에는 이변이 없었다니요.”

왕먀오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이 모두 우연인 것이지요.”

“하지만······ 여러 세대가 모두 이렇게 평탄하게 살아왔습니다.”

“모두 우연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전체의 역사 역시 우연입니다. 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중대한 이변이 없었으니 운이 아주 좋았지요. 하지만 행운도 결국엔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아니, 끝났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 지금 제가 교수님께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35

“선생이 아는 것이 분명 나보다 많을 겁니다. 좀 더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신은 정말 물리 법칙이 시간과 공간상에서 균일하지 않다고 믿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딩이는 왕먀오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바로 그게 문제지요.”

왕먀오는 그가 회의장에서 영국 육군 대령이 말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이어서 말한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37

저격수(Sniper)와 농장주(Farmer).

‘과학의 경계’ 학자들은 토론할 때 SF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 이것은 두 가지 가설에서 출발하며 모두 우주 규칙의 본질과 관련된다.


42

현대 기술에서 이런 힘은 초자연적인 것이다.


44

그렇다면 누구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대학과 연구소 동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술적 사유를 하는 사람이었다. 왕먀오는 이 사건이 기술을 초월한 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48

“이제야 알겠습니다. ‘과학의 경계’는 당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초 이론을 토론하는 학술 교류 단체가 아니었군요. ‘과학의 경계’와 현실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군요.”

“그 반대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과학의 경계’가 다루는 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기초적이기 때문입니다.”


60

“사흘 뒤, 그러니까 14일 새벽 1시에서 5시까지, 우주 전체가 당신의 위해 반짝일 것입니다.”


82

대학교 3학년 때 들은 정보 과목에서 교수는 강의실에 큰 그림 두 장을 걸었다. 하나는 내용이 많고 정밀한 <청명상하도>였고 다른 하나는 광활한 하늘 사진이었다. 텅 빈 푸른 하늘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구름 한 점이 있을 뿐이었다. 교수는 두 그림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정답은 후자였다. 후자가 전자에 비해 백배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삼체가 바로 그랬다.


90

사루이산은 미소를 지었다. 21세기 초에 미윈 전파천문기지는 외화를 벌기 위해 관광객에게 기지를 개방했었다. 당시 사루이산은 종종 가이드나 강좌를 했는데 이 미소는 관광객―그는 끔찍한 과학 문맹들에게 이미 적응했다―의 질문에 대답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100

“린은 너무 똑똑해. 기초 이론을 하려면 미련해야 해.”

이후 수많은 세월 동안 나는 이 말의 깊은 뜻을 끊임없이 깨달았어. 린, 당신은 정말 너무 똑똑해. 몇 년 전 당신은 일찌감치 지식계에 불어오는 정치적 변화를 간파하고 행동을 시작했지. …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당신은 혁명 주류에 끼지 못했어. 지금의 당신의 한번 봐. 당신의 소매에는 ‘혁명 교직원’이라는 붉은 완장이 없잖아. 당신은 마오 주석의 어록을 들 자격조차 안 되어 빈손으로 올라왔어. 누가 당신을 중국의 대단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했으며 당신의 부모는 또 왜 그렇게 유명한 학자였는지.


101

그 일을 말하면서 당신 아버지는 “중국에서는 아무리 자유로운 사상이라도 결국에는 모두 탁, 하고 땅에 떨어져버리지. 현실의 인력이 너무 무거워”라고 탄식했어.


103

“철학이 실험을 이끄는가, 실험이 철학을 이끄는가?”

예저타이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비판자들은 한순간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자 홍위병이 말했다.

“당연히 정확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과학 실험을 이끌지!”

“그 말은 정확한 철학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실험으로 얻은 참된 지식에 반대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자연계를 인식한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105

“그것은 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여지를 주지.”

어린 홍위병은 즉시 혼란한 생각을 추스른 뒤 가죽 허리띠를 손에 단단히 쥐고 예저타이를 가리켰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나는 모른다.”

“무슨 말이야!”

“모른다고 말했네. 만일 신이 우주 이외의 초의식이라면 나는 그것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네. 서로 상반되는 양쪽 모두 과학은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지.”


109

그리고 이 차갑고 무한한 초원과 숲속에서 ‘불사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뜨거운 피는 소똥보다 더 빨리 식었고 소똥보다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불사르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들은 불살랐던 세대였다.


113

38년 뒤, 예원제는 마지막 순간에 『침묵의 봄』이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떠올랐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사악한 면이 그녀의 젊은 영혼에 치유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를 남겼지만 이 책은 인간의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해주었다. … 그러나 대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이 행위는 문화대혁명과 별 차이가 없었다. 우리 세계가 끼치는 폐해는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기에 정상이거나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행위 중 사악한 것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그런 추론이 그녀를 두렵게 했고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145

우주 전체가 하나가 되어 동시에 반짝거렸다. 마치 바람 속에 홀로 켜져 있는 등불 같았다.


173

또한 이런 특급 기밀 프로젝트에서 기술 핵심 위치에 오르면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낮추었다. 그렇다고 너무 뒤떨어지면 안 되었으므로 상사가 동쪽을 가리키면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서쪽으로 갔고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상사가 ‘이 사람이 열심히 하긴 하지만 능력이 모자라 여기 남겨두면 방해만 되겠군’하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206

“세 개의 태양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보를 기록할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위대한 광경을 본 순간은 겨우 몇 초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누구도 거기에서 도망치거나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세 개의 태양이 하늘에 뜬’ 것은 삼체 세계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재난입니다. 세 개의 태양이 뜨면 행성 지표면은 순식간에 용광로로 변할 것입니다. 그 고온은 암석도 용해시킬 수 있습니다. ‘세 개의 태양이 하늘에 뜬’ 가운데 멸망한 세계에서는 유구한 시간이 흘러야만 다시 생명과 문명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역사 기록이 없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306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은 예원제를 심각한 정신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녀가 직면한 위기는 우선 헌신할 목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였던 그녀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바칠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했던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생각에 빠져들자 세계가 점점 낯설어졌다. 그녀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 계속된 정신적 방황이 그녀를 괴롭혔다. 가정을 이룬 후 그녀의 영혼은 오히려 돌아갈 곳을 잃었다.


337

복수할 생각은 없었다. 태양이 막 떠오르던 그날 새벽 홍안 기지에서 그녀는 그들을 포함한 전 인류에게 복수를 했다.


357

이렇듯 많은 사람이 인류 문명에 철저히 절망해 자신의 종(種)을 증오하고 배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손을 포함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은 것이 지구 삼체 운동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지구 삼체 반군은 정신 귀족 조직이라고도 불렸다. … 삼체 조직도 일반인을 받으려 한 적이 있지만 그런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인류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지식인 계층처럼 심각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현대 과학과 철학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아 자신이 속한 종의 본능에 동질감이 강해 인류 모두를 배반하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식인들은 달랐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인류 외부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했다. 인류 문명은 자기 내부에 강력한 분열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366

심문관: 거시적 세계에서 양성자 두 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균의 털 한 가닥에도 수십억 개의 양성자가 있으니까요. 그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원제: 그건 자물쇠입니다.

심문관: 자물쇠요? 무엇을 잠그는 자물쇠입니까?

예원제: 인류 과학에 족쇄를 채우는 것입니다. 삼체 함대가 도착하기 전인 450년 동안 이 두 개의 양성자 때문에 인류의 과학은 어떤 중대한 진전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에번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두 개의 양성자가 지구에 도착하는 날이 바로 인류 과학이 사망하는 날이다.’


369

“다음의 사실만 말해드리죠. 우주에서 어떤 기술 문명의 등급은 그 문명이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는 미시적 차원에 의해 결정됩니다.”


390

삼체 정보 가운데 삼체인의 생물학적 특징에 대한 묘사는 없었다. 인류는 400여 년 뒤에야 진짜 삼체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보를 읽으면서 예원제는 삼체인을 인간의 이미지로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418

“이번 실험에서 우리가 미시 우주의 문명을 멸망시켰나?”

“적어도 하나의 지능체는요. 그리고 원수님, 우리가 멸망시킨 것은 미시 우주 전체입니다. 그 우주는 고차원에선 매우 거대합니다. 존재하는 지능이나 문명이 하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그들이 거시 세계에 자신들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물론 미시 차원의 고차원 공간에서의 지능과 문명의 형태는 우리가 절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종류지요. 이런 일은 처음 발생한 것도 아닙니다.”


447

아, 시리즈 이름을 ‘지구의 과거’라고 한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소설이 다른 환상문학과 다른 점은 그것이 진실과 가늘게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과학소설이 현대의 신화이자 동화가 아닌 것이다.




2부: 암흑의 숲


12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그저 작고 단순한 신경망 속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교란 때문이었다. 이런 교란은 수시로 나타난다. 땅 의에 자라는 모든 풀잎과 그 위의 이슬방울 속에서,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그 구름 뒤에 숨겨진 별들 위에서······. 이런 교란에는 목적이 없다. 하지만 우연한 교란들이 하나로 모이면 목적이 출현한다.


14

개미는 ‘7’이나 ‘1’보다 ‘9’가 더 마음에 들었다. 뭐가 좋은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원시 단세포 생명에게서 풍기는 미감과 비슷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17

반복된 망각은 그에게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었다. 평생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유전자에 의해 본능이라 불리는 저장소에 모두 새겨져 있었다.


19

개미는 태생적으로 눈에 민감하다. 누군가의 눈이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은 그에게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0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정보의 바다에도 변방이 있고, 그 변방에도 또 변방이 있으며, 그 변방의 변방에도 변방의 변방의 변방이 있다. 그 가장 깊숙하고 외진 변방에서 가상 세계가 부활했다. 춥고 기이한 여명 속에 피라미드도 없고 UN 본부와 푸코의 진자도 없다. 오로지 광활하고 단단한 황야만이 꽁꽁 언 금속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62

파벽자 2호: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질 것인지가 인류의 기본적인 가치관 문제라는 건 이해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 가치관이 인류 사회를 발전시켰지만 인류 멸망의 위기에 봉착한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함정이 되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우리 인간들조차도 그 함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습니다. 주여,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결국에는 이 우물에서 단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78

누가 떠나고 누가 남을 거야? 이건 단순한 불평등을 넘어 생존권의 문제야. 엘리트든 부자든 평범한 서민이든, 누가 떠나든 간에 도망치지 못하고 남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과 도덕의 마지노선이 붕괴되는 거라고!


85

하지만 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큰 의미가 없었다. 걸음 대신 말로 하는 산책일 뿐이었고,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말은 부자가 마음으로 소통한 이 세 마디뿐이었다. ”깊이 생각해봐.”

“생각한 다음에는요?”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밖에 해줄 수가 없구나.”


109

소설 속 인물이 10분 동안 하는 행동 속에는 그가 10년간 겪은 모든 것이 녹아 있어야 해. 소설의 줄거리에만 국한하지 말고 그녀의 인생 전체를 상상해봐. 글로 쓰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


134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활짝 펼쳐진 책처럼 그들에게 전부 읽히고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이제 아무런 비밀도 없습니다.


265

그의 가련함은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인 비루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고골의 소설 속 말단직원 같았다. 온종일 남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떨고 매사에 행여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지 않을까,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걱정하며 유리 천장 위로 보이는 높은 사회계층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런 부류 말이다. 그들은 사회적인 지위는 낮지만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평생 무미건조하고 잡다한 일 속에 파묻혀 심신이 피폐한 상태로 살아간다. 타일러는 그런 소인배를 가장 경멸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자신이 구해야 하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이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타일러는 정말이지 세상을 구원한다는 일에 회의가 들었다.


275

거시적 양자 상태(Macroscopic Quantum State)의 지구 함대.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지구 우주군을 궤멸시켜서 그들의 양자 유령으로 삼체 함대에 저항하겠다는 것이 선생의 계획입니다. 양자 유령은 절대 질 수 없습니다. 이미 궤멸당한 함대는 다시 궤멸당할 수 없으니까요.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죽을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291

뤄지는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속 가장 무른 곳을 움직인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온 세상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느끼고, 그로 하여금 일생을 다 바쳐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는지 말이다. 그건 바로 그녀의 투명하고 순수한 눈빛 속에 감추어진 엷은 우울함이었다. 그 우울함이 벽난로 불빛처럼 그녀의 아름다움을 아련하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그것이 배경음악처럼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잠재의식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그를 사랑의 심연으로 조금씩 끌어당겼던 것이다.


306

겨울은 사색의 계절이다.

뤄지는 자신이 면벽자가 된 그 순간부터 면벽 프로젝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며 한 번도 사고가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모든 사고가 잠재의식 속에서 이루어져 그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313

그는 더 이상 감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레이디아즈가 태양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뤄지는 그때부터 심각한 밤하늘 공포증을 앓기 시작했다.


582

200여 년 전 아서 클라크는 자신의 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고도로 발전한 외계 문명이 달에 남긴 검은 비석 모노리스에 대해 묘사했다. 탐사대가 보통의 측정기로 이 비석의 세 변을 측량했을 때 비율이 1:3:9였다. 그런데 그 후 아무리 정밀한 방식으로 측량해도 그 비율이 조금의 오차도 없는 1:3:9였다. 클라크는 “그 문명은 이렇게 오만한 방식으로 자기 능력을 과시했다”라고 썼다.


585

내가 너희를 멸망시키는 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3부: 사신의 영생


32

어떤 마침표일까. 물리학의 마침표이길 바랐다.

양둥에게는 기본적인 신념이 있었다. 삶과 세상은 추악할지 몰라도 미시적, 거시적 종극은 조화롭고 아름다우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세계는 이 아름다운 바다 위에 떠 있는 거품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일상의 세계는 아름다운 겉포장을 두르고, 그것이 품고 있는 미시적, 거시적 현실은 어지럽고 추악했다.


33

그녀는 무서웠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물리학 없이도 그녀는 살 수 있다. 이론물리학과 무관한 직업을 선택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여느 여자들처럼 평온하게 살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산다면 그녀에게는 영혼의 반쪽만 가지고 사는 삶이 될 것이다.

반쪽 영혼으로 사는 건 별일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망각과 적응에 능하기만 하면 반쪽으로 살아도 평온하게, 심지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을 합치면 온전한 하나의 영혼이 된다.


37

“현재의 지구는 생명체가 자신의 위해 만든 터전이에요. 신과 무관하게요.”


29

대자연은 정말 저절로 생겨났을까?


109

하지만 청신은 그를 가장 비참하게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가 무서웠다. 항공우주학을 전공했으므로 우주가 위험하다는 걸 남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지옥이 땅 밑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청신은 그의 일부, 그것도 영혼이 담겨 있는 일부가 춥고 광활한 암흑의 심연 속에서 영원히 떠돌기를 바라고 있었다.


142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경고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생명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것은 지구 생물의 진화사에서 이정표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지로 올라온 물고기는 더 이상 물고기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로 나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여러분, 외우주로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신중하십시오. 상상보다 훨씬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158

하지만 개체의 반응은 예측할 수 없다.


176

첫째, 구세주로 추앙받는 것과 단두대로 끌려가는 것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196

‘탈물질 효과’란 우주 심리학의 한 개념이다. 사람이 지구 세계에 있을 때는 물질의 실체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잠재의식 속 세계의 이미지가 물질과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태양계에서 멀리 떨어진 외우주에서는 별은 멀리서 흐릿하게 반짝이는 점이고 은하계도 그저 희미한 빛을 내는 엷은 안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감각기관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세계가 질량과 실체감을 상실하고 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우주인의 잠재의식 속 세계가 물질적인 세계에서 공허한 세계로 바뀌게 되는데 이런 멘털모델이 바로 우주 심리학의 기본 좌표다. 인간의 심리 속에서 전함이 우주의 유일한 물질적 실체가 되고 아광속에서는 전함의 운동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우주는 끝없이 넓은 전시장으로 변하고 별들은 환각으로 변하며 전함이 우주의 유일한 전시품이 된다. 이런 멘털모델은 거대한 고독감을 수반하게 되며, 잠재의식 속에서 ‘전시품’의 슈퍼 관찰자에 대한 환상이 생기고 더 나아가 자신을 완전히 들켜버렸다는 불안감과 수동성이 나타나기 쉽다.


198

“아뇨. 생각해보면 우린 비슷한 점이 있어요. 우린 둘 다 관찰 대상이 있어요. 당신은 정신병자를 관찰하고 나는 우주를 관찰하고. 내게도 당신처럼 관찰 대상이 정상적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조화와 아름다움이죠.”

“당신의 관찰 대상은 정상적인 것 같군요.”

“틀렸어요, 의사 양반. … 내 관찰 대상은 전신마비 환자예요!”

“광속 때문이에요. … 우주의 한쪽 끝에 있는 빛이 영원히 다른 쪽 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광속보다 더 빠른 건 없으니까 이쪽의 정보와 작용력도 우주의 다른 쪽 끝까지 전달될 수 없죠. 영원히. 우주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뇌에서 나온 신경 신호가 온몸으로 전달되지 못해요. 그의 뇌는 팔다리의 존재를 모르고 팔다리는 뇌의 존재를 모르죠. 또 몸의 각 부위도 다른 부위의 존재를 몰라요. 이게 전신마비 환자가 아니고 뭐겠어요? 이것보다 더 끔찍한 비유도 할 수 있어요.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는 시체예요. …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광속 외의 또 다른 ‘3’의 증상이 있어요. … 3차원이죠. 끈 이론에서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우주는 10차원이에요. 하지만 그중 세 개의 차원만이 거시 세계에서 우리 세계를 형성하고 나머지는 모두 미시 세계에 말려 있어요. … 앞에서 말한 광속과 이걸 합쳐서 우주의 3과 30만 증후군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짧은 혼란이 지나간 뒤 두 사람 모두 기이한 안도감을 느꼈다. 공포에 떨 시간도 없을 만큼 급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 다행스러웠다. 조금 전 우주에 관한 대화는 죽음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였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은 한마디를 떠올렸다.

“우리 둘 다 관찰 대상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210

뤄지는 삼체 세계와 54년 동안 마주 보고 있었다. 염세주의자였던 그가 54년 동안 면벽한 진정한 면벽자이자 54년 동안 검을 들고 서 있는 지구 문명의 수호자로 변해 있었다.


211

청신은 누구도 지난 54년간 뤄지의 노고에 대해 감사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PDC 의장과 함대 참모 총장은 “뤄지가 없는 상태로 여러 번 예행연습을 했기 때문에 그 연습에 감사를 전하는 절차가 없었다”라는 변명조차 청신에게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인류는 뤄지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216

검잡이 신분으로 저 머나먼 세계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뤄지와 달랐다. 그녀는 이것이 생사의 결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체스판과 같아서 자신은 가만히 앉아 여러 가지 상황을 예상하고 상대가 말을 옮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해 그에 대한 대응 방법을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체스에 일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말을 옮기지 않았다. 상대는 체스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고 있었다.

청신의 머리 위에 쌓여 있는 40억 년의 세월이 그녀를 질식하게 했다. 그녀의 잠재의식이 사력을 다해 위로 헤엄쳤다. 지면으로 올라가 숨을 쉬고 싶었다. 그녀의 잠재의식 속 지상에는 생물이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룡을 포함한 대형 파충류였다. 시선이 닿는 지평선 끝까지 그들로 가득 차 있었다. …

사방은 고요했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들의 눈이었다. 공룡의 눈, 삼엽충과 개미의 눈, 새와 올챙이의 눈, 세균의 눈······. 인류의 눈만 해도 1000억 쌍으로 은하계 항성의 수와 맞먹었다. 그중에는 평범한 사람의 눈도 있고, 다빈치, 셰익스피어, 아인슈타인의 눈도 있었다.

스위치를 누르면 35억 년의 여정이 멈추고 모든 것이 우주의 기나긴 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마치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이 거미줄처럼 끝없이 늘어났지만 청신은 이제 망설이지 않았고 결정을 번복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결정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전자 깊숙한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유전자의 시초는 40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결정은 그때 이미 내려졌고 수십 억 년의 세월 속에서 다져지고 굳어졌다. 이 결정이 맞든 틀리든 자신에게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곧 고민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226

이런 공포감의 바탕에는 암흑의 숲 위협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위협자와 피위협자가 위협에 대해 동일한 공포를 갖는 것이 바로 궁극의 위협의 특징이다.


230

그녀의 가장 큰 잘못은 진정으로 적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243

지자가 보호 지역을 발표할 때 사람들은 그녀가 ‘Reserv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이 단어는 오랜 옛날 인디언 보호 구역의 명칭이다. 또 다른 머나먼 대륙에 문명인이 상륙했을 때 그것 인디언에게 닥친 운명은 호주 원주민보다 더 비참했다.


303

난생처음 4차원 공간에 들어가 3차원 세계를 본 사람이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보았던 세계가 실제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3차원 세계를 그림에 비유한다면 그는 그림을 그의 얼굴과 수직으로 놓았을 때의 모습밖에는 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본 세상은 그림의 앞면이 아닌 측면, 즉 가느다란 선일 뿐이다. 4차원에서 보아야만 비로소 그림의 앞면이 그를 향해 평평하게 놓이게 된다. 그러면 그는 세상 그 무엇도 보이지 않도록 가릴 수 없고 아무리 폐쇄된 내부도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아주 단순한 법칙이지만 정말로 이 법칙이 실현된다면 사람들은 엄청난 시각적 충격에 사로잡힐 것이다. 가릴 수도 없고 덮을 수도 없으므로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걸 보는 사람들은 3차원 세계보다 억만 배나 많은 정보를 마주해야 한다. 시각적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면 대뇌의 처리 능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304

하지만 4차원에서 3차원을 볼 때는 3차원 사물이 끝없이 세밀하게 나타났다. 감추어지거나 덮여 있던 모든 것이 겉으로 드러나 병렬로 이어졌다.


306


“우리가 3차원 공간에서 ‘광활하다’라는 말로 형용하는 사물들이 무한히 복제되어 3차원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339

아늑한 꿈이 산산이 깨지고 암흑의 숲 이론이 드디어 현실로 확인되었다. 삼체 세계가 파괴되었다.


344

성명을 발표하는 지자의 표정과 목소리가 모두 평온했다. 이 평온함은 삼체 세계의 말을 전하기만 하던 때의 무감각함이 아니라 조종자의 영혼과 정신이 오롯이 담긴 진실함이자 인류가 멸망에 직면했다면 김히 가질 수 없는 고귀함과 존엄이었다. 이 파괴된 문명을 향해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경외심이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차올랐다.


347

"암흑의 숲 공격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째는 임의성, 둘째는 경제성.”


349

이건 당신에 대한 우리 세계의 존경이에요. 저는 사실대로 대답할 거예요. 설령 그 대답이 삼체 세계에 해가 되는 것이라 해도.


351

인류가 암흑의 숲에서 생존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자해파가 주장하는 방법은 지구 문명을 확실하게 안전한 문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문명의 자해였다.


353

하지만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서 모든 문명이 자기 존재를 감추고 있고, 항성계를 중심으로 아주 먼 거리까지도 지능을 가진 존재의 흔적을 관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주가 정말로 미개하고 황량한 상태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문명들이 이미 성숙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제 알고 있었다.


360

하지만 청신에게 이것은 계속 살아갈 마지막 희망의 단절을 의미했다.

청신에게 생활은 이미 무거운 짐이자 고통이었다. 그녀가 살기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회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지않고 살아가는 것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타당한 형벌이었고,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위험한 문화의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그녀에 대한 숭배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또 다른 안개가 될 것이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었다.


379

이것이 자신이 보는 마지막 일출일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곧 다가올 만남에서 설령 양쪽 모두 대화의 규칙을 충실히 지킨다고 해도 그 머나먼 세계는 그녀를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규칙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일말의 여한조차 남지 않았다.


383

“안녕!”

청신이 말했다. 3세기를 건너온 감정이 잠에서 깨어난 화산처럼 그녀의 의식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감정의 모든 출구를 단호하게 봉쇄하고 자신을 향해 되뇌었다. 기억하라고. 오직 기억만 하라고. 모든 걸 기억하라고.


471

이 정보 해독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바로 원톈밍이 동화 속에 정보를 숨긴 방식을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윈톈밍의 정보 은닉 방식은 2중 은유와 2차원 은유 두 가지로 귀납되었다.


485

등대가 완성된 날, 바다 위를 환히 비추는 등대를 멀리서 바라보다가 문득 꺠달았지. 죽음이 바로 유일하게 영원히 불을 밝히고 있는 등대라는 걸. 어디로 항해하든 결국에는 그 등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 해. 모든 건 언젠가는 사라지고, 사신만이 영생할 수 있어.


514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회적 불평등은 주로 경제적 부나 사회적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했다. 물론 의료 환경의 차이, 빈부격차로 인한 자연재해의 생존률 차이, 전쟁에서 군대와 일반인의 생존률 차이 등등 죽음의 불평등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전체 인구의 1만 분의 1도 안 되는 소수는 안전지대로 피신해 살아남고 나머지 수십억 명은 지구에서 죽음을 기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529

하지만 실험의 주최 측이든 설계하고 진행하는 이들이든 이 실험의 진짜 목적이 과학 연구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건 사실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 광고였다. 국제사회에 벙커 프로젝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실험은 전 세계에 강한 시각적 충격을 줄 수 있도록 매우 직관적이어야 했다.


538

“좋아. 받아들이지.”

청신은 3세기 전 그가 돌아서서 했던, “Send cerebra only(뇌만 보냅시다)”라는 한마디가 훗날 역사를 바꾸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634

딩이는 사막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강의실 대신 사막에서 수업을 해서 학생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 별난 습관을 이렇게 해석했다.

“난 황량한 곳이 좋아. 생명체는 물리학에 방해가 되지.”


635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Ice가 들은 웃음소리 중 가장 사악한 웃음소리였다. 자학의 쾌감, 모든 게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흥분감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희열로 공포를 감추고 결국에는 공포 자체를 탐닉하게 된 자의 웃음이었다.


643

우린 지금 2차원으로 추락하는 공간 속에 있어요. 결국에는 태양계 전체가 2차원으로 떨어질 거예요. 한마디로 태양계가 두께가 없는 그림으로 변하는 겁니다.


644

2차원화되는 과정에서 3차원 물체의 모든 점이 정확한 기하학 법칙에 따라 2차원 평면 위로 투사되었다. 말하자면 그건 탐사정과 인체의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도면이었다.


프랙털 이미지는 이론적인 개념일 뿐 실제 도안은 해상도의 한계 때문에 일정한 정도로 확대되면 프랙털의 성질이 사라진다. 하지만 2차원화된 3차원 물체는 기본 입자 수준의 높은 해상도를 통해 그 무한한 복잡성이 현실에서 온전하게 구현되었다.


646

그건 고정 좌표가 없는 단독 은유였다. 윈톈밍도 그토록 단순하고 직접적인 상징을 동화에 넣는 것이 큰 모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험을 감행했다. 너무나도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생존을 가로막는 건 무능과 무지가 아니라 오만이다.


647

레벌레이션호의 승선원 전원이 그림의 일부가 되었다. 모두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2차원 상태로 우주에 선연히 각인되며 파멸의 거대한 그림 속에 제일 먼저 그려 넣어진 사람들이 되었다.


652

하지만 곧 사라질 더 거대한 것들은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파멸이 거대한 검은 날개처럼 그녀의 생각을 덮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것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652

도피주의에 관한 모든 법률을 폐기하는 결의가 한 시간 전 연방 정부와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하지만 탈출속도가 현재 인류가 가진 우주선의 최고 속도를 훨씬 초월하므로 도주가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659

“1억 년도 보존될 수 있어. 아직도 여기가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아. 여긴 관람객이 온 적이 없어. 관람하기 위한 곳이 아니니까. 이 모든 것이 묘비야. 인류의 묘비.”


664

하지만 결국 진정한 힘을 가진 건 시간이며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문명의 끝에서 그들은 태곳적 갓난아기 때 했던 일을 해야 했다.

돌에 글씨를 새기는 일을.


666

박물관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묘비는 자신을 위해 만드는 것이다.


680

그것은 죽음의 세계, 죽음의 그림이었다.


685

하지만 한없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차원이 줄어든 그 세계가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머니별과 함께 영원히 같은 평면 위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656

다른 유물들을 둘러보았지만 청신은 의욕이 생기지 않탔다. 지금의 자신에게든 먼 미래의 ‘그들’에게든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들이 멸망하고 있는 현실 세계보다 의미 있을 것 같지 않았다.


687

청신과 AA도 의욕이 나지 않아 뤄지처럼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기다리기로 했다. 바로 태양의 2차원화였다.


688

4세기 전 홍안 기지의 산꼭대기에서 예원제도 자기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일몰을 보았다. 그녀의 심장은 곧 끊어질 현처럼 가까스로 뛰고 있었고 그녀의 눈앞에서 검은 안개가 가물거렸다. 서쪽 하늘 끝에서 태양이 구름바다 밑으로 녹아내리는 듯 흘린 피가 서서히 번지며 구름바다와 하늘 전체를 화려하고 웅장한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그것이 인류의 일몰이라고 했다.


690

3차원 세계의 모든 것이 2차원으로 떨어진 뒤 죽음을 맞이했다. 두께가 0인 그림 속에서 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695

청신은 <별이 빛나는 밤>을 두 번 보며 느꼈던 그 기이한 느낌을 떠올렸다. … 별이 빛나는 하늘은 2차원이기 때문이다.

고흐는 어떻게 그걸 그렸을까? 1889년 두 번째 신경 발작을 겪고 있던 그가 착란과 섬망이 교차하는 의식 속에서 5세기 시공을 넘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보았던 걸까? 아니면 반대로 그가 진즉에 미래를 보았고 최후의 심판이 닥친 이날의 광경이 그의 정신적 붕괴와 자살의 진정한 원인이 되었던 걸까?


705

그녀는 결국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두 번 모두 그녀에게 신에 버금가는 권력이 쥐어졌지만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인류 세계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녀의 잘못을 돌이켜줄 수 없었다.


715

설마 영원히 끝나지 않는 걸까?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행동은 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727

청신 자신은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녀의 정신이 계속 살아있도록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윈톈밍이었지만 이제 그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 물론 육체적으로는 계속 살아가겠지만 그건 그저 책임감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지구 문명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막아야 했다.


731

“맞아요. 광속으로 진입한 순간 나도 변했어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시공을 초월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죠. 공간적으로는 우주 끝까지도 갈 수 있고, 시간적으로는 우주 최후의 날까지도 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철학적인 차원이었던 것들이 갑자기 구체적인 현실이 됐어요.”


733

그러니까 태양계는 가장 높은 수준의 방식으로 공격당한 거예요. 어떻게 말하면 지구 문명에겐 영광인 셈이죠. 차원 공격을 사용했다는 건 우릴 무시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이 우주에선 무시당하지 않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736

각기 다른 광속이 평균을 이루며 하나의 속도로 귀결되면 그 속도가 우주의 새로운 C값이 될 거예요. 그러면 우리처럼 유아기 수준의 과학을 가진 문명은 진공 중의 광속이 원래부터 초속 10여 킬로미터이고 이것이 불면의 우주상수라고 생각하겠죠.


737

전원 시대의 우주는 4차원이 아니라 10차원이었어요. 진공 중의 광속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고요. 그때의 빛은 원격 작용이 가능했어요. 플랑크시간 내에 우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도 갈 수 있었죠······.


741

“우주에서 제일 완벽하게 죽은 물체이기도 하고요. 광속이 0이라는 건 진정한 죽음이죠. 절대적인 죽음, 완전한 죽음. 저 안에 있는 기본 입자와 쿼크까지 다 죽었어요. 미세한 진동조차 없어요 죽음의 선 안에 중력원이 없더라도 역시 블랙홀이에요. 중력이 0인 블랙홀이죠. 그 어떤 것도 저 안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어요.”


744

우주는 팽창을 멈춘 뒤 자신의 중력 때문에 붕괴하고 결국 특이점이 되어 다시 빅뱅이 일어날 거예요. 그러면 모든 게 0으로 돌아가겠죠. 최후의 승리자는 역시 대자연일 거예요.


764

하지만 지금 그녀가 우는 것이 윈톈밍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포기였다. 그녀는 마침내 알았다. 얼마나 큰 바람이 한 톨 먼지인 자신을 사방으로 흩날려버렸는지, 얼마나 거대한 강물이 한 조각 나뭇잎이 자신을 떠밀어 보냈는지. 완전히 포기했다. 바람이 몸을 다 흩어버리고 햇빛이 영혼을 다 꿰뚫고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767

시간은 가장 잔인한 것이다.


771

어둠이 사라지고 시간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언어에는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 그들의 들어간 후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면 옳은 말이 아니다. ‘후’는 시간 개념이지만 이곳에는 시간이 없고 전후도 없다. 그들의 들어간 ‘후’의 시간은 수억만 분의 1초보다 짧을 수도 있고, 수억만 년보다 길 수도 있다.


791

모든 지적 존재의 문명은 결국 그들이 가진 생각의 크기만큼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