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실즈가 자기는 말을 더듬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는데 나는 미련해서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조엘 디케르의 소설 <볼티모어의 서>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는 각 주인공이 본인의 상처받은 삶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그들에게 글을 쓰기 위해 힘든 일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은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치유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읽는 책마다 글쓰기를 재촉하는 내용들이 반복하여 눈에 띄고 머리에 박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삶에 치유가 필요하다는 까닭은 아니었고, 작가들이 말하는 글쓰기의 수많은 장점들 때문에 관심이 간 것도 아니었다.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작가들의 읽고 쓰는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다. 그것이 왜 부럽고 존경스러운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감상적이고 직관적인 이유를 말하고 싶지만 그런 표현력과 어휘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글쓰기 책을 몇 권 읽어보았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이론을 습득하거나 글쓰기 연습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작가들의 여러 가지 삶의 일부를 엿보는 것을 즐기게 되었을 뿐이었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서 일해 본 나는 그들의 목 디스크 고통이 걱정되고 안압이 높아지는 통증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내 내고 싶은 욕심이 난다.
자기계발서나 유튜브 방송 속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일기를 오래 써왔다는 얘기나, 긍정적인 사람들이 자기 치유의 시간을 갖기 위해 글쓰기를 해왔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이제라도 글쓰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불안하기도 했다. 글은 솔직하게 써야 하는 것이고 솔직하게 쓰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십 년 가까이 책도 신문도 멀리하며 살았기에 글을 쓸 의지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인풋 없는 아웃풋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글쓰기를 시작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 불혹(不惑)이 다가오면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30세에는 이립(而立)을 체험할 결심은커녕 술을 먹으며 서른 파티를 즐겼지만, 40세가 다가오자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말을 줄이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서 말이 많아진 것인지 휴직과 코로나가 겹쳐 대화할 상대가 없는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쏟아내는 내가 걱정스럽다. ‘오늘은 꼭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야지’라고 작심하지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말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글쓰기가 약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통해 내 안의 수다를 해소하여 말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그러면 훗날 남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렇게 쓰는 순간에도 내가 작가도 아닌데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적는 것이 좀 부끄럽고 무색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말을 아끼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