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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Aug 13. 2021

후회의 무쓸모에 대하여

다시 태어나도 결혼한다면 누구와 하겠습니까?


지금의 남편(아내)과 할 것인가요?


 20대 중반에는 남자친구와 함께 운동하고 놀고 공부하는 것에 모든 마음을 쏟아 울고 웃었다. 20대 후반이 되자 집착하고 질투하는 전쟁 같은 연애시즌이 종료되었다. 남자친구 없이 혼자 운동하고 여행을 다니는 행복이 중요했다. 이런 나를 조용히 서포트하며 사생활을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 남편을 만났다. 그 시작부터 결혼까지 한 번도 싸울 시간 없이 결혼이 진행되었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남편과의 결혼을 선택할 것 같다. 그리고 또다시 후회를 반복할 것이다.


결혼적령기


결혼적령기에 마침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그때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그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것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적령기란 사회에서 통상 말하는 시기가 아닌,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의 시기이다.


 이례적으로 소와 돼지의 살처분 업무에 모든 과 직원들이 투입될 만큼 구제역 감염이 심각한 해가 있었다. 축산농가, 직원들, 소와 돼지 모두에게 잔인한 해였다. 나는 행정직 중 유일하게 구제역 예방접종 상황실에 긴급히 투입되었다. 그때 예방접종 지원 업무를 하던 남편을 처음 보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나에게도 조금은 잔인한 해였다.(남편과 나는 부부공무원이다.) 주변 언니들이 관심 갖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남편에게 이미 호감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고리타분한 조직에서는 늘 상사와 선배들에게 매일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지금은 둘째 나으라는 잔소리를 매일 듣는다.) 남편과 우연한 만남을 가지도록 도와준 선배도 존재했다.(지금도 그 선배는 본인 덕에 결혼했다고 생색을 낸다.) 결혼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집에 혼자 있다 기립성저혈압으로 기절을 한 일이었다. 통금시간까지 정해 두며 평생 함께 살자던 부모님이 갑자기 결혼하라고 재촉하셨다. 내가 독거노인이 되어 혼자 집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남편과의 결혼을 부추겼다.


직장


 그렇게 그 상황에 맞추어 결정된 것이 또 있다. 지금의 직장이다. 마침 들어가고자 한 회사의 면접에 떨어지고 얼마 있지 않아 공무원 임용시험이 있었다. 시험을 보고 채점해보니 커트라인 점수였다. 그렇게 좋지 않은 성적으로라도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 어디든 취직을 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방대 졸업 학력으로 지방에서 원하는 직업을 찾으려니 한정적이었다. 그중 안정적이고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곳의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자 마음이 급했다. 그 자세로 다른 공부를 했다면 다른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다른 직장에 들어갔다면,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못했겠네? 이러면 이야기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계획도 없이 직장을 결정하고 결혼을 했다는 걸 처음 깨달았을 때 한심하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하지만 내가 직장이 간절한 때에 공무원 임용시험 원서접수가 있었던 것도, 같은 해에 남편이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보러 고향에 내려온 것도, 몇 년 후에 구제역 상황실에 투입된 것도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건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냥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의 결혼에 운명이란 단어를 쓰면서 낭만적인 분위기가 조금도 없다니 미혼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나는 가끔 무섭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옆에 누가 있느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모래사장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파도를 바라보고 있어도 몇 분에 한 번씩은 파도가 꼭 내 무릎까지 들이닥친다. 반복되는 상황인데도 무섭다.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가만히 서서 파도를 맞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한다. 파도를 피하지 않았을 때도, 파도를 피해 뒤로 뛰었을 때도 그 순간이 지나면 결국은 깔깔 웃게 된다. 어차피 웃게 될 일이라고 주변 상황에 날 맡겼다. 하지만 이제는 파도가 커져 해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스스로 버티거나 도망갈 수 있어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이 든다.


남편의 생각


 그나저나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결혼할 것이라고 대답하고 다닌다는 것이 남편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다.(부부공무원의 단점 중 하나이다.) 어느 날 남편이 정색을 하며 그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야, 내 의견도 안 물어보고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어떡해. 내가 왜 다시 태어나도 자기랑 결혼할 거라 생각해?”(정말 낭만은 하나도 없는 ‘자기’라는 호칭이다.)    


아무래도 남편은 나와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렇게 홀가분할까. 이번 생은 운명 따위에 맡겨버리고 다음 생애를 생각하고 있다니. 죽음을 생각해야 할 나이에 죽음을 넘어서서 다음 생애까지 생각하고 있으니 스스로 어이없다. 어쨌든 남편이 다음 생애엔 운명을 거스르길 응원하며 더 당당히 이야기한다.

“난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결혼할 거야. 딱 그 상황에 딱 남편이 나타나 나에게 그렇게 잘 했는데 어떻게 결혼을 안 할 수 있겠어?”


벌써 가을냄새가 나다


시간이 급격히 빨라졌다고 느끼는 올 해이다. 운명처럼 내게 찾아온 직장과 가정도 영원하지 않다. 남은 날들은 아무 쓸모없는 후회는 거두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의 운명에 어떻게든 영향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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