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대전환 시대, 극단적 전문화만이 살아남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
2025년 말, 글로벌 산업계에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가 전달됐다. 자체 AI를 만들겠다는 야심은 더 이상 경쟁력의 원천이 아니라 자원 낭비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Menlo Ventures의 2025년 보고서는 이 전환의 규모를 숫자로 증명한다. 기업 AI 활용 사례의 76%가 자체 구축이 아닌 외부 구매로 전환됐으며, 이 수치는 불과 1년 전인 2024년에는 53%에 불과했다. 기업 생성형 AI 지출은 같은 기간 115억 달러에서 370억 달러로 3.2배 폭증했다. 이 구조적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가장 고통스럽게 드러난 현장이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카메라 온리 전략의 좌절
현대차 자회사 포티투닷(42dot)은 약 1년간 카메라 8대 기반의 비전 중심 자율주행 시스템 AtriaAI를 개발해왔다. LiDAR라는 고가의 센서 없이 카메라만으로 Level 2+ 자율주행을 구현하겠다는 이 프로젝트는 테슬라의 비전 온리 접근법을 추종한 야심찬 도전이었다. 자율주행 기술의 미래가 카메라 기반 시스템에 있다는 확신, 그리고 한국 대기업이 독자 기술력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이 프로젝트의 동력이었다.
그러나 현대차 AVP 사업부가 Waymo Open Dataset 벤치마크로 내부 평가를 실시한 결과는 참담했다. AtriaAI는 100점 만점에 25점을 기록했다. 같은 평가에서 테슬라 FSD는 90점, 화웨이 ADS는 70점, 모빌아이와 모멘타는 각각 50점을 받았다. AtriaAI는 단순히 뒤처진 것이 아니라 압도적 최하위였다. 이 25점이라는 숫자는 현대차 내부에 충격파를 던졌고, 자체 개발 전략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촉발시켰다.
문제의 핵심은 아키텍처의 세대 차이에 있었다. AtriaAI는 인지 레이어에만 CNN 기반 딥러닝을 적용하고,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과 제어 영역은 규칙 기반 시스템에 머물러 있었다. 쉽게 말해, 눈은 AI로 보되 판단은 사람이 미리 짜놓은 규칙대로 내리는 구조였다. 반면 테슬라 FSD를 비롯한 프론티어 시스템들은 인지에서 판단, 제어까지 전 과정을 end-to-end 신경망으로 처리하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AtriaAI의 25점은 단순한 성능 부족이 아니라 기술 세대 자체가 달랐음을 보여주는 냉혹한 진단서였다.
NVIDIA Alpamayo의 등장과 현대차의 급선회
이 격차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 것이 NVIDIA가 CES 2026에서 공개한 Alpamayo VLA 모델이다. Vision-Language-Action, 즉 시각과 언어와 행동을 통합하는 이 모델은 100억 개의 파라미터를 갖추고 있으며, 25개국 2,500개 이상 도시에서 수집한 1,727시간의 주행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연쇄 사고(Chain of Thought) 추론을 자율주행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AI가 단순히 패턴을 인식하는 것을 넘어, 마치 숙련된 운전자가 복잡한 상황에서 단계적으로 사고하듯 추론 과정을 거쳐 주행 판단을 내린다는 의미다. 게다가 이 모델은 오픈 모델로 공개됐다. 한 기업이 수년간 폐쇄적으로 개발한 시스템이 공개 모델 하나에 의해 근본적으로 무력화되는 상황이 현실이 된 것이다.
현대차의 대응은 빠르고 단호했다. 먼저 NVIDIA VP 출신이자 테슬라 오토파일럿 초기 팀 멤버였던 박민우를 42dot의 새 CEO로 영입했다. 이 인사는 상징적이다. 자체 기술 개발의 기수가 아닌, 빅테크 생태계를 깊이 이해하는 인물에게 조직의 미래를 맡겼다는 것은 전략 방향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어서 AtriaAI에 투입됐던 연구 인력을 Alpamayo 기반 프로젝트로 재배치했다. 자체 개발 엔진을 버리고 NVIDIA의 프론티어 모델 위에서 경쟁력을 쌓겠다는 선언이었다.
물적 투자 규모도 이 전환의 진지함을 보여준다. 현대차는 NVIDIA Blackwell GPU 5만 개 구매를 약속하며 한국 내 AI 팩토리 구축에 나섰다. 정의선 회장은 CES 2026에서 젠슨 황 NVIDIA CEO와 비공개 회동을 가졌는데, 이는 2025년 10월 서울에서의 이른바 "깐부 회동"에 이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 한국 최대 제조기업의 총수가 반도체 플랫폼 기업의 CEO와 반복적으로 만나는 장면은, 자동차 산업의 권력 구조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송창현의 퇴장이 말해주는 것
이 전환 과정에서 42dot 창업자 송창현 대표는 2025년 말 사임했다. 테슬라를 추종한 카메라 온리 전략이 데이터와 컴퓨팅 자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내부 비판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송창현의 퇴장은 한 개인의 경영 실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대기업 산하 AI 조직이 빅테크와 독립적으로 프론티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의 퇴장이었다.
테슬라의 비전 온리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에 깔린 수백만 대의 차량에서 실시간으로 주행 데이터가 수집되고, 그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철학을 가져왔지만 데이터와 연산 자원이라는 양 날개 없이 비행하려 한 것이 AtriaAI의 근본적 한계였다. 아무리 뛰어난 엔지니어를 모아도,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을 설계해도, 수천억 달러의 투자가 만들어내는 데이터와 컴퓨팅의 규모 격차를 개별 기업의 노력으로 좁히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게임이 되어버렸다.
25점이 남긴 교훈
현대차 AtriaAI의 사례가 특별한 이유는, 자체 AI 개발의 한계가 벤치마크라는 객관적 숫자로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들이 자체 AI의 성능을 내부적으로만 평가하거나, 정성적 지표로 모호하게 포장하며 투자를 지속한다. 그러나 AtriaAI의 25점은 그런 자기 위안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프론티어 모델 대비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능은, 추가 투자와 시간으로 메울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인 접근법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이 교훈은 현대차만의 것이 아니다. 전 세계 대기업들이 거의 동시에,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GM이 100억 달러를 태운 Cruise의 좌절, 포드와 폭스바겐이 36억 달러를 잃은 Argo AI의 폐업, 삼성 Gauss의 후순위 전락, 카카오의 솔직한 항복 선언. 이 모든 사례가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한다. 빅테크가 연간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는 AI 개발 경쟁에서, 개별 대기업이 독자적으로 프론티어 수준의 AI를 구축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현대차의 AtriaAI 25점은 이 시대적 전환을 가장 명징하게 각인시킨 숫자로 기록될 것이다.
현대차의 AtriaAI 사례가 충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한 기업의 판단 착오로 치부할 수는 없다. 2024년에서 2025년 사이, 전 세계 주요 산업의 대기업들이 거의 동시에 자체 AI 개발을 포기하고 빅테크의 프론티어 모델을 도입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자동차에서 IT, 금융, 통신, 제약까지. 이 연쇄적 항복은 특정 산업이나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AI 기술의 발전 속도와 규모의 경제가 만들어낸 구조적 대전환이다.
자동차 산업: 수십억 달러의 매몰 비용
자동차 산업은 자체 AI 개발의 좌절을 가장 극적으로, 가장 값비싸게 경험한 분야다. GM은 2016년부터 로보택시 자회사 Cruise에 약 90억에서 100억 달러를 투자하며 자율주행의 미래를 독자적으로 열겠다는 비전을 추구했다. 그러나 현실은 분기마다 6억 달러씩 쌓여가는 손실, 그리고 202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보행자 사고라는 치명적 위기였다. 결국 GM은 2024년 12월 로보택시 운영을 전면 중단했고, 이 결정으로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절감될 것으로 예상됐다. 거의 10년에 걸친 도전이 만들어낸 것은 기술적 성과가 아니라 천문학적 매몰 비용이었다.
GM의 이후 행보는 현대차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2025년 3월 NVIDIA GTC에서 NVIDIA DRIVE AGX Blackwell 아키텍처 기반의 차세대 차량 개발과 NVIDIA Omniverse 기반 공장 디지털 트윈 구축을 발표한 것이다. 자체 기술로 자율주행을 구현하겠다던 기업이, 이제 NVIDIA의 플랫폼 위에서 차량을 설계하고 공장을 운영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포드와 폭스바겐은 더 일찍, 더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양사가 합계 36억 달러를 투자한 자율주행 스타트업 Argo AI는 2022년 10월 폐업했다. 포드 CEO 짐 팔리는 이후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겼다. "완전 자율주행 차량의 수익화는 아직 멀었으며, 반드시 그 기술을 우리가 만들 필요는 없다." 이 한 문장에 자동차 산업 전체의 인식 전환이 압축되어 있다. 기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 경쟁력이라는 새로운 현실의 수용이었다.
세계 최대 자동차 제조사 토요타마저 이 흐름에 합류했다. 2025년 1월 NVIDIA DRIVE AGX Orin 플랫폼 도입을 발표하면서, 토요타라는 이름이 가진 제조업의 자존심조차 AI 플랫폼의 규모 앞에서는 실용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줬다. GM의 100억 달러, 포드와 폭스바겐의 36억 달러. 이 숫자들은 자동차 산업이 자체 AI 개발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기 위해 지불한 수업료다.
한국 IT 산업: 삼성의 전환과 카카오의 솔직한 선언
한국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행보가 이 전환의 상징이 되고 있다. 삼성은 2023년 자체 생성형 AI 모델 Samsung Gauss를 공개하며 독자 AI 생태계 구축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다. 2024년에는 MoE(Mixture of Experts) 아키텍처 기반의 Gauss 2까지 발전시키며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다. 그러나 2025년 2월 5일, 이재용 회장과 샘 올트먼 OpenAI CEO의 면담 이후 삼성의 방향은 급격히 선회했다.
면담 직후 전사적으로 외부 AI 적극 도입 지시가 내려졌다. 특히 주목할 점은 반도체 DS 사업부에 외부 AI를 우선 도입하라는 방침이 확정됐다는 것이다. 삼성의 핵심 경쟁력이자 미래 전략의 중심인 반도체 사업부에서조차 자체 AI가 아닌 외부 모델을 쓰라는 결정은, Gauss 프로젝트의 사실상 후순위 전락을 의미했다. 이미 갤럭시 S25에는 구글 Gemini가 탑재되어 검색, 번역, 음성비서 기능에서 대폭적인 개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사의 AI 모델로는 소비자의 기대 수준에 부응할 수 없다는 현실을 시장이 먼저 증명해버린 것이다.
삼성이 체면을 의식해 우회적으로 전환한 것과 달리, 카카오는 한국 대기업 중 가장 솔직한 항복 선언을 했다. 카카오 CTO 정규돈은 2025년 9월, LLM 개발이 이미 국가 차원의 총력전이 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게임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 발언의 의미는 깊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플랫폼 기업 중 하나인 카카오조차 대규모 언어모델 개발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카카오의 전략적 대응은 명확했다. AI를 운영체제에 비유하되, 운영체제 자체를 만드는 대신 그 위에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집중하는 오케스트레이션 전략으로 전환한 것이다. 카카오톡에 ChatGPT를 통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포털 다음은 AI 스타트업 업스테이지에 매각했다. 한국 인터넷 역사의 한 축이었던 다음 포털의 매각은, AI 시대에 플랫폼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카카오 나름의 냉정한 판단을 반영한다.
금융 산업: 가장 빠르고 가장 광범위한 도입
금융 산업은 빅테크 AI를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도입한 분야다. 금융업의 특성상 정보 처리 속도와 정확성이 곧 수익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스페인 BBVA가 12만 명 전 직원에 ChatGPT Enterprise를 배포한 것은 이 흐름의 대표적 사례다. 부서별로, 팀별로 도입을 실험하는 단계를 건너뛰고 전사적 배포를 단행한 것은, AI가 더 이상 특정 부서의 생산성 도구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업무 방식을 재정의하는 인프라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모건스탠리의 사례는 더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준다. 16,000명 이상의 금융자문사에 GPT-4 기반 도구를 도입한 결과, 자문사 팀의 98%가 이 도구를 정기적으로 사용하게 됐으며, 고객 문의 응답 시간을 10분의 1로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 98%라는 채택률은 기업 IT 도구 도입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치다. 이는 도구가 단순히 편리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으면 동료 대비 경쟁력에서 뒤처진다는 현장의 압박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골드만삭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멀티 모델 전략을 채택했다. OpenAI, Google, Anthropic, Meta의 모델을 모두 활용하는 접근법이다. 특정 빅테크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각 모델의 강점을 업무 영역별로 최적화하겠다는 전략인데, 이 역시 자체 AI를 개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외부 모델 중 무엇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같은 방향이다. 도이체방크는 구글 Gemini 기반 리서치 도구 DB Lumina를 도입해 금융 리서치의 효율을 높이고 있다. 글로벌 주요 금융기관 중 독자 AI 모델 개발을 고집하는 곳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통신과 제약: R&D 격차가 만드는 불가피한 선택
통신 산업에서는 도이체텔레콤의 사례가 이 전환의 구조적 원인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도이체텔레콤은 NVIDIA와 10억 유로, 약 12억 달러 규모의 파트너십을 체결해 뮌헨에 Blackwell GPU 1만 개 규모의 세계 최초 산업 AI 클라우드를 구축하고 있다. 유럽 최대 통신사가 독자 AI 인프라가 아닌 NVIDIA 플랫폼 기반 클라우드를 선택한 배경에는 냉혹한 숫자가 있다. 도이체텔레콤의 2024년 R&D 지출은 2,100만 유로에 불과한 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같은 해 325억 달러를 AI에 투자했다. 약 1,500배의 격차다. 이 현실 앞에서 독자 개발은 선택지조차 될 수 없다.
제약 산업도 같은 논리로 움직이고 있다. 일라이 릴리는 NVIDIA와 10억 달러 규모의 신약 개발 AI 연구소를 공동 설립했다. 신약 개발은 평균 10년 이상의 시간과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드는 과정인데, AI가 분자 시뮬레이션, 임상시험 설계, 바이오마커 발굴 등을 가속화할 수 있다면 그 경제적 가치는 막대하다. 노바티스도 마이크로소프트 Azure 기반 AI 혁신 연구소를 운영하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두 글로벌 제약사 모두 AI를 핵심 연구 인프라로 인식하되, 그 인프라를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빅테크 파트너에게서 공급받는 구조를 택한 것이다.
항복이 아닌 생존 전략
이 연쇄적 전환을 단순히 항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각 기업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한 생존 전략이다. GM이 Cruise에 매년 수십억 달러를 쏟으며 독자 기술을 추구하는 동안, 그 자원을 NVIDIA 플랫폼 위에서 차별화된 자동차를 만드는 데 투입했다면 어땠을까. 삼성이 Gauss 개발에 집중하는 대신 OpenAI나 구글의 모델을 빠르게 통합해 갤럭시 사용자 경험을 혁신했다면 어땠을까. 이 반사실적 질문들이 바로 각 기업 이사회에서 오간 논의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합리적 선택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거시적 결과는 우려스럽다. 자동차, IT, 금융, 통신, 제약 등 주요 산업의 대기업들이 일제히 빅테크 플랫폼에 의존하게 되면서, AI 기술의 주도권은 소수의 플랫폼 기업에 더욱 집중되고 있다. 개별 기업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 산업 전체로는 빅테크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구조적 딜레마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딜레마의 경제적 실체, 즉 왜 76%의 기업이 만드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는지의 논리를 다음 장에서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들의 자체 AI 개발 포기가 단순한 유행이나 심리적 위축의 결과라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체 개발로 회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환의 배후에는 뒤집기 어려운 경제적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비용, 인재, 속도라는 기업 경쟁력의 세 가지 핵심 축에서 자체 개발이 동시에 열세에 놓이는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76%의 기업이 만드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한 것은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산술적 귀결이다.
비용: 만드는 것은 사는 것보다 비싸다
자체 AI 개발의 비용 구조를 분해하면, 왜 대부분의 기업이 외부 도입을 선택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우선 AI 팀을 구성하는 인건비부터 상당하다. 머신러닝 엔지니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MLOps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핵심 인력 한 명당 연간 45만에서 80만 달러의 급여와 복리후생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팀을 꾸리려면 5명에서 10명은 있어야 하니, 인건비만으로 연간 수백만 달러가 든다. 여기에 엔터프라이즈급 AI 솔루션을 실제로 개발하는 데 10만에서 50만 달러 이상이 추가되고, 시스템 유지보수에 월 5,000에서 2만 달러, 데이터 보안과 컴플라이언스 비용까지 합치면 연간 투입 비용은 수억 원을 가볍게 넘긴다.
반면 외부 AI 구독 서비스의 비용은 극적으로 낮다. 시트당 월 200에서 400달러 수준이면 프론티어 수준의 AI를 즉시 사용할 수 있다. CloudZero 데이터에 따르면 기업의 월평균 AI 지출은 2025년 85,521달러로 전년 대비 36% 증가했지만, 이는 자체 개발 비용과 비교하면 여전히 훨씬 저렴한 수준이다. 더구나 외부 서비스는 도입 즉시 사용이 가능하고, 모델이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추가 비용 없이 최신 성능을 활용할 수 있다. 자체 개발은 완성까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반면, 외부 도입은 수일에서 수주 안에 배포가 가능하다.
이 비용 격차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기업들의 체계적 비용 과소추정 경향이다. 조사에 따르면 85%의 기업이 AI 프로젝트 비용을 10% 이상 과소추정한다. 초기 개발 비용은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하더라도, 데이터 정제와 라벨링, 모델 재학습, 인프라 확장, 보안 감사, 규제 대응 등 후속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전형적 패턴이다. 현대차가 AtriaAI에 투입한 1년간의 개발 비용, GM이 Cruise에 쏟아부은 100억 달러는 모두 이 과소추정의 비극적 사례에 해당한다.
성능 격차: 아키텍처 세대가 다르다
비용이 같더라도 성능이 우월하다면 자체 개발의 명분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프론티어 모델과 자체 개발 모델 사이의 성능 격차는 단순한 점수 차이가 아니라 기술 세대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차 AtriaAI의 25점과 테슬라 FSD의 90점 사이에 놓인 것은 알고리즘의 정교함이 아니라 아키텍처의 근본적 설계 철학이다. 규칙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과 end-to-end 신경망 기반 시스템은 같은 기술의 발전 단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종류의 기술이다.
이 격차의 근본 원인은 투자 규모에 있다. 빅테크 기업들은 현재 연간 4,000억에서 5,000억 달러를 AI에 투자하고 있다. 이 숫자는 대부분의 국가 GDP보다 크고, 개별 대기업의 전체 매출액보다도 큰 경우가 많다. 도이체텔레콤의 연간 R&D 지출 2,100만 유로와 마이크로소프트의 325억 달러 투자를 나란히 놓으면, 약 1,500배의 격차다. 이 규모의 차이는 똑똑한 엔지니어 몇 명을 더 채용한다고 좁혀지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의 양과 질, 컴퓨팅 인프라의 규모, 연구 인력의 밀도, 실험과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자본력까지 모든 차원에서 격차가 누적되며 복리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a16z가 100명의 CIO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는 이 현실에 대한 현장의 인식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기업이 파인튜닝의 ROI가 낮다고 응답하며, 프론티어 모델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인튜닝이란 범용 모델을 자사 데이터에 맞게 추가 학습시키는 과정인데, 이 최소한의 커스터마이징조차 투자 대비 효과가 낮다는 것은, 프론티어 모델의 범용 성능이 이미 대부분의 기업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의미다. 굳이 비싼 비용을 들여 자체 모델을 만들거나 기존 모델을 미세 조정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론에 기업들이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속도: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비용과 성능 외에 세 번째 축인 속도의 문제가 있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자체 개발에 1년을 투입하는 동안 프론티어 모델은 여러 세대를 앞서나간다. 현대차가 AtriaAI를 약 1년간 개발하는 동안 NVIDIA는 Alpamayo VLA를 공개했고, 그 순간 AtriaAI의 접근법 자체가 구세대가 되어버렸다. 이 속도의 비대칭성은 자체 개발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2025년 업무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리더의 82%가 올해를 AI로 전략과 운영을 재설계해야 할 전환의 해로 인식하고 있다. 이 인식은 곧 시간 압박으로 작용한다. 경쟁사가 빅테크 AI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동안, 자체 AI 개발에 몰두하며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특히 금융 산업처럼 정보 처리 속도가 곧 수익인 분야에서는, 모건스탠리처럼 GPT-4를 빠르게 도입해 응답 시간을 10분의 1로 줄이는 것이 자체 모델 개발보다 압도적으로 현명한 선택이 된다.
기업 생성형 AI 지출이 2024년 115억 달러에서 2025년 370억 달러로 3.2배 폭증한 것은, 이 속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기업들의 집단적 가속을 반영한다. 한 해 만에 3배 이상 늘어난 지출 규모는, 기업들이 AI 도입을 더 이상 실험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투자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배포의 역설: 78%가 도입했지만 39%만 성과를 본다
그런데 흥미로운 역설이 존재한다. 맥킨지 데이터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78%가 최소 한 개 이상의 기능에 AI를 배포했지만, 전사적 수익 효과를 보는 기업은 39%에 불과하다. 절반이 넘는 기업이 AI를 도입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괴리는 얼핏 AI 도입 자체에 대한 회의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성과가 나지 않는 기업들의 상당수는 자체 개발이나 초기 단계의 솔루션을 사용하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경험한 경우다. 이 실망이 오히려 검증된 외부 솔루션 도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직접 만들어봤지만 ROI가 나오지 않았다는 경험이, 차라리 검증된 프론티어 모델을 빠르게 도입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다. 자체 개발의 실패 경험이 역설적으로 외부 구매의 가장 강력한 촉진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 전체 구조를 종합하면, Build에서 Buy로의 전환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한 구조적 변화임이 분명해진다. 비용은 자체 개발이 압도적으로 비싸고, 성능은 프론티어 모델이 세대 차이로 앞서며, 속도는 외부 도입이 비교 불가하게 빠르다. 세 축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때,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 된다. 그리고 이 합리적 선택들이 집합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가 바로, 빅테크와 대기업 사이에 형성되는 1조 달러 규모의 거대한 동맹이다.
개별 기업이 자체 AI 개발을 포기하고 빅테크 플랫폼을 도입하는 것은, 각각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경영 판단이다. 그러나 이 합리적 판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그 총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구조적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2024년에서 2025년 사이 체결된 빅테크와 대기업 간 파트너십의 총 규모는 1조 달러를 상회한다. 이 천문학적 자금이 형성하는 폐쇄적 생태계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진입할 수 있는 시장의 문을 구조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초대형 파트너십의 지형도
이 거대한 동맹의 구체적 지형도를 살펴보면, 그 규모와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핵심적인 축은 마이크로소프트와 OpenAI의 관계다. 마이크로소프트는 OpenAI 지분 27%에 해당하는 1,35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고, OpenAI는 그 대가로 2,500억 달러 규모의 Azure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매하기로 약속했다. IP 라이선스는 2032년까지 연장됐으며, OpenAI는 매출의 약 20%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배분하는 구조다. 2025년 3분기까지 마이크로소프트가 이 구조에서 받은 순수익 배분액만 8억 6,580만 달러에 달한다. 두 회사의 관계는 단순한 투자자와 피투자자의 관계를 넘어, 사실상 하나의 경제적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다.
NVIDIA와 OpenAI는 최대 1,000억 달러를 투자해 10기가와트 규모의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수백만 개의 GPU를 배치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AWS와 OpenAI 사이에는 380억 달러 규모의 7년 클라우드 컴퓨팅 계약이 체결됐는데, 이는 역대 최대 규모의 단일 클라우드 계약으로 기록된다. 구글은 Anthropic에 최대 100만 개의 TPU 접근권을 제공하는 수백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프로젝트 Stargate가 있다. OpenAI, 소프트뱅크, 오라클, NVIDIA가 연합해 미국 내 데이터센터에 5,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이 계획은, AI 인프라 경쟁이 단일 기업의 역량을 넘어 국가적 프로젝트 수준으로 격상됐음을 보여준다.
산업 분야에서도 대형 거래가 잇따르고 있다. NVIDIA와 지멘스는 산업 AI 운영체제를 공동 개발하고 있으며, Snowflake는 OpenAI 및 Anthropic과 각각 2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해 12,600개 이상의 고객사에 AI 모델을 공급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각각이 거대한 비즈니스 딜이지만, 전체를 조감하면 소수의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산업 전반이 재편되는 거대한 구조적 전환의 단면들이다.
순환 금융이라는 자기 강화 메커니즘
이 파트너십들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면,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서는 자기 강화적 메커니즘이 드러난다. 이른바 순환 금융 구조다. 빅테크가 AI 기업에 투자하면, 그 투자금이 다시 빅테크의 클라우드 서비스 구매로 돌아오는 순환 루프가 형성되어 있다.
가장 명확한 사례가 아마존과 OpenAI의 관계다. 아마존이 OpenAI에 100억 달러를 투자하면, OpenAI는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을 AWS 컴퓨팅 서비스 구매에 사용한다. 아마존의 재무제표에는 이것이 새로운 클라우드 매출로 잡힌다. 투자한 돈이 매출로 돌아오는 구조다. 마이크로소프트와 OpenAI의 관계는 이 순환을 더 정교하게 보여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금이 OpenAI의 Azure 서비스 구매로 환류하고, OpenAI의 성장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클라우드 매출과 Copilot 제품군의 경쟁력을 강화한다.
이 순환 구조의 문제는, 외부에서 보면 AI 산업 전체가 급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수 기업 간의 자금 순환이 성장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물론 실제 시장 확대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지만, 순환 금융이 만들어내는 과대 계상 효과를 걷어내면 실질적 성장 규모는 표면적 수치보다 작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순환 구조 안에 진입하지 못한 기업에게는 자금도, 인프라도, 고객 접근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플랫폼 번들링이 만드는 시장 봉쇄
순환 금융이 자본의 성벽을 쌓는다면, 플랫폼 번들링은 시장 접근의 성벽을 쌓는다. 마이크로소프트 365 Copilot은 이 전략의 교과서적 사례다. 포춘 500 기업의 70%가 Copilot을 도입했고, 전 세계 3억 이상의 Office 365 시트에 AI 기능이 번들링되고 있다. Windows 11 기기에는 Copilot이 자동 설치되어, 사용자가 별도의 선택 과정 없이 마이크로소프트의 AI를 쓰게 되는 사실상의 강제 채택 구조가 형성됐다.
이것이 독립 AI 스타트업에 의미하는 바는 치명적이다. AI 기반 문서 작성 도구를 만든 스타트업을 상상해보자. 그 제품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기업 고객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Office 365에 비슷한 기능이 무료로 내장되어 있다면 별도의 구독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프레젠테이션 AI 도구, 이메일 작성 보조, 문서 요약 등 기업 생산성 AI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 논리가 작동한다. 스타트업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다른 스타트업이 아니라, 이미 수억 사용자를 보유한 플랫폼에 내장된 무료 기능이 되어버렸다.
AWS Bedrock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10만 개 이상의 조직에 서비스를 제공하며 약 100개의 서버리스 파운데이션 모델을 제공하는 Bedrock은, 기업이 AI를 도입할 때 별도의 스타트업 솔루션을 탐색할 필요 없이 이미 사용 중인 AWS 인프라 안에서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세일즈포스도 ALEA라는 올인클루시브 AI 라이선스 모델을 도입해 고객 락인을 강화하고 있다. Agentic Enterprise License Agreements라는 이름의 이 라이선스는, AI 에이전트 기능을 기존 CRM 플랫폼과 통합 제공함으로써 고객이 별도의 AI 솔루션을 찾아 나설 이유를 없애는 전략이다.
이 번들링 전략의 핵심은 AI를 독립 제품이 아닌 기존 플랫폼의 기능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독립된 AI 제품으로서의 가치는 점점 희석되고, AI는 플랫폼의 부가 기능으로 녹아든다. 이 과정에서 AI를 독립 제품으로 판매하려는 스타트업의 시장이 체계적으로 잠식된다.
NVIDIA의 투자 제국
빅테크 중에서도 NVIDIA의 전략적 포지션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NVIDIA는 GPU라는 AI의 핵심 하드웨어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동시에, 2025년에만 67건의 AI 관련 벤처 투자를 집행했다. 추론 칩 기업 Groq을 200억 달러에 인수한 것은 이 전략의 정점이다.
NVIDIA의 투자 전략이 만들어내는 구조는 정교하다. NVIDIA가 AI 스타트업에 투자하면, 그 스타트업은 AI 모델을 학습시키기 위해 NVIDIA의 GPU를 대량 구매한다. 스타트업이 성장할수록 더 많은 GPU가 필요하고, 이는 다시 NVIDIA의 매출로 돌아온다. 마이크로소프트-OpenAI의 순환 금융 구조와 본질적으로 같은 메커니즘이되, NVIDIA의 경우 하드웨어라는 물리적 병목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강력하다. 소프트웨어 플랫폼은 이론적으로 대안이 존재하지만, 고성능 AI 학습용 GPU 시장에서 NVIDIA의 지배력은 대체재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현대차가 Blackwell GPU 5만 개를 구매하고, 도이체텔레콤이 뮌헨에 Blackwell GPU 1만 개 규모의 AI 클라우드를 구축하며, GM이 NVIDIA DRIVE AGX 기반으로 차량을 개발하는 모든 장면에서, NVIDIA는 플랫폼 제공자이자 투자자이자 생태계의 설계자로 기능한다. AI 시대의 석유가 데이터라면, NVIDIA는 그 석유를 정제하는 유일한 정유소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성벽 안과 밖의 세계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면, 순환 금융과 플랫폼 번들링, 그리고 하드웨어 독점이라는 삼중의 진입장벽이 형성되어 있는 그림이 완성된다. 성벽 안쪽에는 빅테크와 대기업의 독점적 파트너십이, 거대한 자금과 데이터와 고객 기반을 순환시키며 자기 강화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성벽 바깥에는 이 순환 고리에 진입하지 못한 기업들이, 점점 줄어드는 시장 기회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포춘 500 기업의 70%가 이미 Copilot을 쓰고 있다면, 기업 생산성 AI 시장에서 스타트업이 공략할 수 있는 대상은 나머지 30%, 그것도 그중에서 대안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AWS Bedrock의 10만 고객사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기업은 별도의 AI 솔루션을 탐색할 동기가 약하다. 세일즈포스의 ALEA 라이선스에 묶인 기업은 CRM AI를 다른 곳에서 조달할 이유가 없다.
1조 달러의 동맹이 만들어내는 이 구조적 봉쇄 속에서, 스타트업 생태계는 표면적으로는 기록적인 투자를 유치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극단적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AI 스타트업 투자 통계를 표면적으로만 보면, 지금은 스타트업에게 최고의 시대처럼 보인다. 2025년 AI 스타트업은 2,023억 달러를 유치해 전 세계 벤처 캐피탈 투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역사상 어떤 기술 분야도 이 정도의 자본 집중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화려한 총액 뒤에는, 소수의 거대 기업이 대부분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극단적 양극화가 숨어 있다. 기록적 투자의 이면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스타트업들의 이야기가, 이 시대의 진짜 얼굴이다.
2,023억 달러의 착시
2,023억 달러라는 숫자를 분해하면 양극화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 금액의 69%가 1억 달러 이상의 메가라운드에 집중됐다. 소수의 대형 딜이 전체 통계를 끌어올리고 있는 구조다. 파운데이션 모델 기업들, 즉 대규모 언어모델이나 멀티모달 모델을 직접 개발하는 기업들만으로 800억 달러를 흡수했는데, 이는 전체 AI 펀딩의 40%에 해당한다. 더 놀라운 것은 OpenAI와 Anthropic 단 두 회사가 전 세계 벤처 투자의 14%를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 수만 개의 스타트업이 경쟁하는 벤처 시장에서, 두 기업이 7분의 1을 독차지한 것이다.
이 편중은 나머지 스타트업에게 구조적 자금 경색을 의미한다. 벤처 캐피탈의 총 규모가 무한하지 않은 이상, 소수 기업에 대한 초대형 투자는 나머지 기업에 돌아갈 자금을 줄인다. 1억 달러 미만의 투자를 받는 초기 및 중기 단계 스타트업에게 실질적으로 가용한 자금은 통계가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전체 파이가 커졌지만, 그 파이에서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접근할 수 있는 조각은 오히려 줄어든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사라진 기업들
통계가 아닌 실제 사례에서 이 양극화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주목할 사례는 Jasper AI다. AI 글쓰기 도구로 한때 15억 달러의 기업가치 평가를 받으며 1억 3,100만 달러를 유치한 Jasper는, 생성형 AI 붐의 초기 수혜자로 화려하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Copilot을 Office 365에 내장하고, ChatGPT의 글쓰기 능력이 빠르게 향상되면서 Jasper의 차별화 포인트가 급속히 희석됐다. 매출은 2023년 1억 2,000만 달러에서 2024년 3,500만 달러로 53% 급감했다. 1년 만에 매출이 반 토막 난 것이다. CEO가 교체되고 회사는 마케팅 코파일럿이라는 좁은 영역으로 피벗을 시도하고 있지만, 15억 달러 가치평가의 영광은 돌이키기 어려운 과거가 됐다.
자율주행 분야의 Ghost Autonomy는 더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2억 3,88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고 49건의 특허를 보유한 이 기업은, 대규모 언어모델 기반의 자율주행이라는 독자적 접근법을 추구했다.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시도였지만, 업계의 수용을 얻는 데 실패하며 2024년 4월 문을 닫았다. 2억 달러가 넘는 투자금과 49건의 특허가 기업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시장에서 자본과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냉혹한 교훈을 남긴다.
AI 하드웨어 분야의 Humane은 이 시기의 가장 상징적인 실패 사례 중 하나다. 전 애플 임원들이 창업한 이 스타트업은 2억 4,100만 달러를 유치하며 AI Pin이라는 웨어러블 AI 디바이스를 출시했다. 그러나 제품 출시 후 쏟아진 것은 기대가 아니라 혹평이었다. 거의 모든 기능에서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은 AI Pin은 시장에서 외면당했고, Humane은 결국 2025년 2월 HP에 1억 1,600만 달러에 매각됐다. 투자금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한 결과다. 애플이라는 화려한 출신 배경과 2억 달러가 넘는 자금이 프론티어 모델의 성능 앞에서는 무력했다.
기업 AI 분석 스타트업 Noogata의 사례는 또 다른 유형의 실패를 보여준다. 펩시코, 콜게이트 등 쟁쟁한 대형 고객을 확보한 이 기업은, 고객 기반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파일럿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도입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 근본적 원인은 AWS, 구글 클라우드 등 대형 클라우드 플랫폼들이 AI 분석 기능을 자사 서비스에 번들링하기 시작하면서, Noogata의 독립적 가치제안이 소멸한 것이다. 좋은 고객이 있어도, 그 고객이 이미 사용 중인 플랫폼에 같은 기능이 무료로 탑재되면 별도의 구독을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다. Noogata는 2025년 5월 폐업했다.
래퍼 스타트업의 구조적 취약성
이 사라진 기업들의 공통점은 소위 래퍼 스타트업이라는 구조적 취약성에 있다. 래퍼란 빅테크의 프론티어 모델 위에 사용자 인터페이스나 특정 기능을 덧씌워 서비스를 만드는 사업 모델을 말한다. 기반 모델의 API를 호출하고, 프롬프트를 최적화하며,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는 것이 핵심인데, 문제는 이 차별화 요소가 기반 모델의 발전에 의해 언제든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OpenAI CEO 샘 올트먼은 2024년 4월 이 위험을 직접 경고했다. "95%의 세계는 모델이 계속 좋아지는 쪽에 베팅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스타트업이 모델이 현재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인 일을 하기만 해도 여러분을 밀어버릴 겁니다." 이 경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반복되는 패턴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ChatGPT가 PDF 대화 기능을 추가하자 PDF 분석을 핵심 가치로 내세웠던 스타트업들의 존재 이유가 하룻밤 사이에 증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Copilot을 PowerPoint에 내장하면서 프레젠테이션 AI 도구 Tome을 비롯한 독립 스타트업들이 존립 위기에 놓였다.
이 래퍼 스타트업의 취약성을 수치로 보여주는 데이터가 있다. SimpleClosure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폐업하는 AI 래퍼 스타트업의 중간 조달 금액은 약 240만 달러였다. 수백만 달러를 투자받아 제품을 만들었지만, 빅테크의 한 번의 기능 업데이트로 시장이 소멸하는 구조. 이 240만 달러라는 숫자는 래퍼 스타트업이 가진 구조적 취약성의 가격표다.
올트먼의 경고가 특히 잔인한 것은, 그가 바로 이 밀어버림을 실행하는 당사자라는 점이다. OpenAI는 API를 통해 수많은 스타트업의 사업 기반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자사 제품에 같은 기능을 내장해 그 스타트업들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플랫폼 제공자가 곧 경쟁자가 되는 이 구조는, 과거 앱스토어 생태계에서 애플이나 구글이 인기 앱의 기능을 운영체제에 흡수하던 패턴의 AI 버전이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위기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글로벌 양극화에 더해 고유한 구조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규 기술 스타트업 등록 건수가 2021년 239,620건에서 2024년 214,917건으로 4년 연속 감소하고 있다. 매년 감소폭이 누적되며 한국의 창업 생태계 자체가 위축되는 추세다.
자금 흐름은 더 심각한 상황을 보여준다. 한국 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VC 투자는 2024년 7년 최저치인 약 15억 달러를 기록했다. 외국 VC의 한국 투자는 59.5% 급감해 3억 2,500만 달러에 머물렀다. 가장 충격적인 수치는 후기 단계 투자의 변화다. 2022년에서 2023년 사이 28억 달러에 달하던 후기 단계 투자가 2024년에는 5억 달러로 82% 폭락했다. 후기 단계 투자는 스타트업이 초기 검증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스케일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인데, 이 자금이 급감했다는 것은 성장 잠재력이 있는 스타트업조차 한국 내에서 성장 자금을 확보하기 극도로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한국 AI 스타트업의 3년 생존율은 56%에 불과하다. 창업 후 3년 안에 거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이 환경에서 한 AI 스타트업 CEO가 남긴 말은 한국 생태계의 현실을 압축한다. "한국에서 조달할 수 있는 총 자금이 미국에 비해 너무 적어, 미국 이전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자금 규모의 절대적 열세가 인재와 기업의 해외 유출을 촉진하고, 이 유출이 다시 국내 생태계를 약화시키는 악순환이 형성되고 있다.
양극화의 구조적 의미
이 양극화는 단순히 큰 기업이 잘되고 작은 기업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AI 산업의 구조 자체가 소수의 인프라 기업과 플랫폼 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중간 지대가 소멸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거의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중간 규모의 기업이 다양한 틈새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프론티어 모델의 범용성이 너무 높아서, 약간의 차별화만으로는 독립적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수십억 달러를 가져가는 소수의 AI 거인과, 240만 달러를 조달하고 사라지는 다수의 래퍼 스타트업. 이 두 극단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지속가능한 사업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시대 스타트업의 핵심 도전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도전에 성공하고 있는 기업들이 존재한다. 빅테크의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찾아내는 이 기업들의 전략이 무엇인지,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차례다.
앞에서 다룬 그림들은 분명 암울하다. 1조 달러의 빅테크 동맹, API 래퍼 스타트업의 대량 도태, 한국 생태계의 위축. 이 흐름만 보면 스타트업이 AI 시대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데이터는 다른 이야기도 들려준다. Menlo Ventures의 분석에 따르면, AI 네이티브 스타트업이 2025년 AI 애플리케이션 시장의 63%를 점유했다. 이 수치는 2024년의 36%에서 불과 1년 만에 급등한 것이다. 빅테크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과 동시에, 특정 영역에서는 스타트업이 오히려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는 역설적 현실이 존재한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싸우느냐의 문제다.
법률, 의료, 개발 — 수직형 AI의 약진
빅테크를 압도하는 스타트업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범용적 AI 기능이 아니라 특정 산업의 깊은 곳에서 차별화를 만들어내는 수직형 AI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CB Insights AI 100 데이터에 따르면 수직형 AI 스타트업이 2025년 상반기 기준 11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해, 수평형 및 인프라 카테고리를 앞질렀다.
법률 AI 분야의 Harvey는 이 전략의 교과서적 성공 사례다. 세콰이어 캐피탈과 클라이너퍼킨스라는 실리콘밸리 최고의 투자자들이 참여한 Harvey는 50억 달러 가치평가의 Series E를 달성했다. Harvey가 ChatGPT나 Claude 같은 범용 AI와 다른 점은, 법률 문서의 검토와 분석, 계약서 초안 작성, 판례 리서치 등 법률 실무의 구체적 워크플로우에 깊이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가 실제로 일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 과정의 비효율을 정확히 공략한다. 범용 AI에 법률 관련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것과, 법률 업무 전체 프로세스를 재설계한 전용 도구를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현장에서 체감하는 가치의 차이가 크다. 이 차이가 Harvey의 해자다.
의료 분야의 Abridge는 4억 6,400만 달러를 유치하며 40개 이상의 의료 시스템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Abridge의 핵심은 의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를 AI로 전사하고, 이를 구조화된 의료 기록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단순한 음성 인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의학 용어의 정확한 이해, 진단 코드와의 매핑, 의료 기록의 법적 요건 충족, 환자 개인정보 보호 규정 준수 등 의료라는 도메인 특유의 복잡성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범용 AI가 의사의 말을 텍스트로 변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의료 체계가 요구하는 형식과 정확도로 처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개발자 도구 분야에서 Cursor를 만든 Anysphere는 90억 달러 가치평가를 기록하며, AI 코딩 도구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Cursor가 GitHub Copilot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의미심장하다. Copilot이 기존 코드 편집기 위에 AI 자동완성 기능을 얹는 방식이라면, Cursor는 AI를 중심으로 개발 워크플로우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설계했다. 단순히 코드 한 줄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고, 대규모 코드 변경을 제안하며, 개발자와 대화하듯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개발 경험을 창조한 것이다. 래퍼가 아니라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 핵심이다.
기업 검색 분야의 Glean은 72억 달러 가치평가를 기록하며, 기업 내 다양한 SaaS 도구에 흩어진 정보를 통합 검색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업이 사용하는 수십 개의 소프트웨어에 분산된 지식을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통합하는 이 접근법은, 단일 SaaS 플랫폼 안에서만 작동하는 빅테크의 번들링 AI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가치를 제공한다.
빅테크가 진입하기 어려운 영역
이 수직형 AI 스타트업들이 성공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활동하는 영역이 빅테크의 범용 접근법으로는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빅테크가 구조적으로 진입하기 어려운 영역들도 존재한다.
방위 기술이 대표적이다. Anduril, Shield AI, Helsing 같은 국방 AI 스타트업들은 정부 계약의 특수성 덕분에 빅테크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절연되어 있다. 국방 분야는 보안 등급, 규제 요건, 정부 조달 프로세스 등 진입 장벽이 기술 이외의 영역에 두텁게 쌓여 있어, 빅테크라 하더라도 쉽게 침투하기 어렵다. 더구나 각국 정부가 핵심 안보 기술의 국산화를 강화하는 추세에서, 국방 AI는 빅테크의 글로벌 플랫폼 전략과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영역이다.
로보틱스와 피지컬 AI도 마찬가지다. Figure 같은 휴머노이드 로봇 스타트업은, 소프트웨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드웨어 전문성이 필수적인 영역에서 활동한다. 로봇의 관절 설계, 모터 제어, 센서 통합, 안전 인증 등 물리적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필요한 전문성은 소프트웨어 중심의 빅테크 기업이 단기간에 확보하기 어렵다. 물론 NVIDIA가 Omniverse를 통해 로봇 시뮬레이션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지만, 실제 로봇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역량과 시뮬레이션 플랫폼을 제공하는 역량은 별개의 영역이다.
데이터 해자라는 궁극의 방어선
이 승리하는 스타트업들의 가장 깊은 해자는 결국 데이터에 있다. Northzone 파트너 몰리 올터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 수직 카테고리에서 해자를 쌓는 것이 훨씬 쉽다. 최고의 해자는 데이터 해자다." NEA 파트너 릴라 트레티코프도 "모델 레이어 내에서도 전문화가 일어날 것"이라 전망했다.
Harvey가 수천 건의 법률 문서에서 축적한 법률 도메인 데이터, Abridge가 40개 이상의 의료 시스템에서 수집한 의사-환자 대화 데이터, Cursor가 수백만 개발자의 코딩 패턴에서 학습한 개발 워크플로우 데이터. 이것들은 OpenAI나 구글이 아무리 거대한 범용 모델을 만들어도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자산이다. 범용 모델은 인터넷의 공개 데이터로 학습되지만, 수직형 AI가 축적하는 도메인 특화 데이터는 해당 산업의 현장에서만 생성되고,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이 늘어날수록 풍부해지는 네트워크 효과를 가진다.
이 데이터 해자의 논리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스타트업이 빅테크와 같은 토양에서 같은 작물을 재배하면 규모의 경제에서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빅테크가 접근하지 못하는 토양을 확보하고, 그 토양에서만 자라는 고유한 작물을 재배한다면, 규모의 차이는 더 이상 결정적 요인이 아니게 된다.
한국의 가능성: LG EXAONE과 네이버의 방어전
한국에서는 LG AI Research가 이 전략의 주목할 만한 사례를 제공한다. LG의 EXAONE 4.0은 한국 국가 AI 모델 경진대회에서 90.2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 점수는 벤치마크 평가, 전문가 평가, 사용자 평가 전 부문에서 최고점을 기록한 것이며, 글로벌 오픈웨이트 모델 중에서도 7위에 올랐다. LG가 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자, 화학, 에너지 등 LG 그룹 계열사의 산업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산업 특화 전략이 있다. 범용 성능에서 GPT-4나 Claude와 정면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와 산업 도메인이라는 특화 영역에서 경쟁력을 구축한 것이다.
네이버도 HyperCLOVA X THINK로 한국어 벤치마크에서 GPT-4.1을 매칭하거나 초과하는 성능을 보이며 자주 AI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어라는 언어적 특수성과 네이버 생태계의 방대한 한국 데이터가 만드는 해자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 방어선에도 균열이 보이고 있다. LINE Yahoo가 네이버의 기술을 포기하고 OpenAI를 도입하는 이른바 탈네이버화가 진행 중이다. 네이버의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글로벌 시장에서 OpenAI나 구글의 브랜드 파워와 생태계 규모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한국어와 한국 시장이라는 특화 영역에서의 강점이, 글로벌 플랫폼의 확장 속도를 얼마나 오래 막아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LG EXAONE과 네이버의 사례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양면적 사례다.
승리의 공식: 빅테크가 내일 10배 더 나은 모델을 내놔도
Wing Venture Capital 파트너 제이크 플롬버그가 던진 질문은, 이 시대 스타트업 생존의 가장 정확한 리트머스 테스트를 제공한다. "OpenAI나 Anthropic이 내일 10배 더 나은 모델을 출시해도, 이 회사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으려면, 그 기업의 가치가 기반 모델의 성능이 아닌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Harvey는 모델이 10배 좋아져도 법률 워크플로우의 전문성과 법률 데이터의 축적에서 가치를 유지한다. Abridge는 모델이 10배 좋아져도 의료 시스템과의 깊은 통합과 의료 규제 충족에서 대체 불가하다. Cursor는 모델이 10배 좋아져도 개발자가 경험하는 워크플로우의 혁신에서 차별화를 유지한다. 이 기업들이 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가치가 AI 모델 위에 얹혀 있는 것이 아니라 AI 모델 바깥의 현실 세계, 즉 특정 산업의 규제, 데이터, 워크플로우, 고객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독점적 데이터, 깊은 도메인 전문성, 복잡한 워크플로우 통합, 규제 특수성. 이 네 가지가 수직형 AI 스타트업의 생존 공식이다. 빅테크의 범용 플랫폼이 아무리 강력해져도, 이 요소들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한 번으로 복제할 수 없다. 시간과 현장 경험과 신뢰의 축적이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이 바뀐 것이다.
여섯 개의 장에 걸쳐 살펴본 데이터와 사례들은, 2024년에서 2025년 사이 AI 산업에서 비가역적 구조 전환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현대차 AtriaAI의 25점, GM의 100억 달러 매몰 비용, 삼성 Gauss의 후순위 전락, 카카오의 솔직한 항복 선언. 이 사건들은 개별 기업의 판단 착오가 아니라, 빅테크가 연간 수천억 달러를 투입해 만든 프론티어 모델 앞에서 대기업의 독자 개발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구조적 현실의 표현이다. 이 전환이 향후 어디로 향할 것인지, 그리고 이 변화 속에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를 종합할 차례다.
가속화는 멈추지 않는다
이 추세는 현재 가속화 단계에 있으며, 단기간 내 방향이 바뀔 가능성은 낮다. 가트너는 2028년까지 기업 소프트웨어의 33%에 에이전틱 AI가 포함될 것으로 예측한다. 2024년에는 이 비율이 1% 미만이었으니, 4년 만에 30배 이상 확대되는 셈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2개월에서 18개월 내에 81%의 기업이 AI 에이전트를 본격 통합할 것으로 전망한다. 기업 AI가 도구의 단계를 넘어 코파일럿을 거쳐 오토파일럿으로 진화하면서, 빅테크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Databricks Ventures VP의 예측은 이 가속화의 다음 국면을 보여준다. "2026년은 CIO들이 AI 벤더 스프롤을 억제하고, 중복 도구를 합리화하며, 성과를 증명한 AI 기술에만 집중하는 해가 될 것이다." 이 전망이 의미하는 바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검증된 솔루션에 대한 집중 투자가 이뤄지면서 AI 도입이 더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실험 단계에 있는 다수의 스타트업 도구가 정리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업들이 도구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아직 충분한 성과를 입증하지 못한 스타트업 솔루션은 빅테크 플랫폼의 번들링 기능으로 대체될 위험이 크다.
반대 시그널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가속화의 경로가 일직선인 것은 아니다. 빅테크의 독점적 그립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반대 시그널들도 감지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변수는 오픈소스 모델의 부상이다. DeepSeek, Qwen, Kimi 등 강력한 성능의 오픈소스 모델이 등장하면서, 독점 모델의 가격 프리미엄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프론티어 모델과 오픈소스 모델의 성능 격차가 줄어들수록, 기업들이 빅테크의 독점 모델에 지불하는 비용의 정당성이 약해진다. 오픈소스 모델은 기업이 자체 인프라에서 운영할 수 있어 데이터 주권과 프라이버시 측면에서도 이점이 있다.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빅테크 플랫폼에 대한 종속이 아닌 다양한 모델의 자유로운 조합이라는 대안적 경로가 열릴 수 있다.
상호운용성 표준의 확산도 주목해야 할 변화다. MCP, 즉 Model Context Protocol과 Agent2Agent 같은 표준이 확산되면, 특정 플랫폼에 묶이지 않고 다양한 AI 시스템 간의 상호 연동이 가능해진다. 벤더 락인이 완화되면, 기업들은 빅테크 플랫폼의 전체 스택을 구매하는 대신 각 레이어에서 최적의 솔루션을 선택하는 베스트 오브 브리드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이 공간에서 스타트업의 기회가 새롭게 열릴 수 있다.
실제로 기업들의 행동에서도 단일 벤더 종속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고 있다. 전체 기업의 37%가 이미 5개 이상의 AI 모델을 동시에 배포하고 있다. 골드만삭스가 OpenAI, Google, Anthropic, Meta 모델을 모두 활용하는 멀티 모델 전략을 택한 것처럼, 기업들은 한 곳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리스크를 의식적으로 분산하려 하고 있다. Snowflake CEO가 "빅테크의 AI 장악력이 2026년 느슨해질 것"이라 전망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파이는 커지고 있다, 문제는 분배다
이 논의에서 놓쳐서는 안 될 거시적 맥락이 있다. 세콰이어 캐피탈은 AI가 소프트웨어 시장뿐 아니라 서비스 시장까지 공격하면서, 이전 기술 전환보다 최소 한 자릿수, 즉 10배 이상 더 큰 수익 풀을 창출할 것으로 전망한다. 기존의 기술 혁명이 주로 소프트웨어 시장을 재편했다면, AI는 법률, 의료, 교육, 금융 자문, 컨설팅 등 인간 전문가의 서비스 시장까지 침투하고 있다. 이 시장의 규모는 소프트웨어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전체 파이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빅테크가 시장을 독점하더라도 절대적 기회의 양은 충분히 클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전 세계 서비스 산업의 규모가 수조 달러에 달하는데, AI가 이 시장의 일부만 디지털화하더라도 생성되는 새로운 시장의 크기는 지금의 AI 산업보다 몇 배나 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분배에 있다. 세콰이어의 전망대로 파이가 10배 커지더라도, 그 파이의 대부분을 3개에서 4개의 슈퍼 플랫폼이 장악하는 구조가 2026년 말까지 고착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NVIDIA를 중심으로 한 이 슈퍼 플랫폼들이 인프라에서 애플리케이션까지 전 레이어를 수직 통합하면, 남은 기업들이 접근할 수 있는 시장은 파이의 절대 크기에 비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극단적 전문화라는 역설적 생존 전략
이 모든 분석이 수렴하는 결론은 하나다. 범용 AI의 시대에 스타트업의 생존 전략은 역설적으로 극단적 전문화에 있다. 빅테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범용 플랫폼을 제공할수록, 그 범용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깊은 틈새에서 차별화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생존 경로가 된다.
이 전문화는 단순히 좁은 시장을 타겟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Harvey의 법률 AI, Abridge의 의료 전사, Cursor의 개발 워크플로우 혁신이 보여주듯, 성공하는 전문화는 특정 산업의 현장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현장에서만 생성되는 데이터를 축적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대체하기 어려운 통합을 만들어낸다. 독점적 데이터, 깊은 도메인 전문성, 복잡한 워크플로우 통합, 규제 특수성. 이 네 가지 요소 중 하나 이상을 확보한 기업만이, 빅테크가 내일 10배 더 나은 모델을 출시해도 존재해야 할 이유를 증명할 수 있다.
스타트업의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빅테크가 관심 갖지 않거나 진입하기 어려운 틈새의 깊은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틈새에서 데이터 해자를 쌓고, 고객과의 신뢰를 축적하며, 워크플로우에 깊이 통합되는 기업만이 다음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한국의 기업과 스타트업에게 이 분석이 전하는 메시지는 특히 절박하다. 한국 테크 스타트업 VC 투자가 7년 최저치를 기록하고, 후기 단계 투자가 82% 폭락한 현실에서, 빅테크와 정면으로 경쟁하는 범용 AI 전략은 자원의 낭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LG EXAONE이 한국 국가 AI 경진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고, 네이버 HyperCLOVA X가 한국어 벤치마크에서 GPT-4.1을 매칭하는 성과는, 한국어와 한국 산업이라는 특화 영역에서의 경쟁력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한다.
한국의 강점은 제조업, 반도체, 조선, 바이오 등 세계적 수준의 산업 기반이다. 이 산업들이 AI 전환 과정에서 생성하는 도메인 특화 데이터는, 실리콘밸리의 빅테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자산이다. 한국 AI의 기회는 글로벌 빅테크를 모방하는 데 있지 않다.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산업들의 깊은 곳에서, 그 산업을 가장 잘 이해하는 AI를 만드는 데 있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
2024년에서 2025년의 데이터가 전달하는 최종 메시지는 이것이다. 자체 AI 개발의 경제성은 대부분의 기업에게 이미 소멸했으며, 이는 비가역적 추세다. 현대차의 AtriaAI 25점은 단일 기업의 실패가 아니라, 빅테크 대비 자원 격차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한계의 상징이다. GM의 100억 달러, 포드와 폭스바겐의 36억 달러는 이 교훈의 가격표다.
빅테크와 대기업의 동맹은 순환 금융, 플랫폼 번들링, 인재 흡수라는 삼중 해자로 시장의 진입 경로를 봉쇄하고 있다. 2025년 AI 래퍼 스타트업의 대량 도태와 Jasper AI 매출의 53% 급락은 이 구조적 변화의 초기 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Cursor의 90억 달러 가치평가, Harvey의 법률 AI 독주, 한국 LG EXAONE의 선전은, 깊은 전문성과 독자적 데이터를 가진 기업에게 여전히 거대한 기회가 있음을 증명한다. 오픈소스 모델의 부상과 상호운용성 표준의 확산은 빅테크의 독점적 그립을 완화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세콰이어의 전망대로 AI가 서비스 시장까지 공격하면서 이전보다 10배 더 큰 수익 풀을 만들어낸다면, 전문화된 플레이어에게 돌아갈 기회의 절대 규모도 결코 작지 않다.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이 바뀐 것이다. 새로운 규칙은 이렇다. 범용의 영역에서는 빅테크에게 길을 내주되, 전문의 영역에서는 빅테크도 넘볼 수 없는 깊이를 구축하라. 데이터로 해자를 쌓고, 워크플로우에 뿌리를 내리며, 고객과의 신뢰를 시간으로 축적하라. AI 모델이 10배 좋아져도 존재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라. 이것이 빅테크 플랫폼이 재편하는 산업 생태계에서,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살아남는 자들이 공유할 유일한 규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