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님 강의 후기
우리는 평소에 뇌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피곤할 때면 "뇌를 잠깐 꺼두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옆 사람이 멍하니 있으면 "저 사람은 뇌가 없는 것 같다"고 농담하기도 한다. 그런데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농담 속에 뇌의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뇌가 없어 보이는 존재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
백 번을 말해도 듣지 않고, 한 번의 경험에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뇌가 없는 존재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은 살아 있고, 먹고, 분열하고,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대사 활동을 모두 수행한다. 그러나 이들은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대로만 산다. 세상이 변해도 자신은 변하지 못한다. 화산이 폭발하고 기후가 바뀌어 먹이가 독성을 띠게 되더라도, 프로그램대로 다가가서 먹고 죽는다. 변이가 일어나 적응하는 개체가 나타나려면 수만 세대가 지나야 하고, 그 전에 대부분은 멸종한다. 이것이 뇌가 없는 존재의 근본적인 한계다.
뇌가 있는 존재는 다르다. 약 4억에서 5억 년 전, 화석 기록에서 최초의 원시적인 뇌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감각기관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운동기관이 있고, 이 둘을 연결하는 신경이 있다.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가 가져온 변화는 혁명적이었다. 독이 있는 먹이를 먹고 고통을 겪은 생물이 그 경험을 기억하고,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을 연결하는 신경 회로를 스스로 바꿔서 다음번에는 그 먹이를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이 변했을 때 모든 것을 유전자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학습하고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 뇌를 통해 탄생한 것이다.
MIT의 물리학자이자 AI 연구자인 맥스 테그마크는 이 차이를 Life 1.0, 2.0, 3.0이라는 프레임워크로 정리한 바 있다. Life 1.0은 하드웨어인 몸도, 소프트웨어인 정신도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존재다. 박테리아, 식물, 아메바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태어날 때 주어진 유전자의 설계도대로 100퍼센트 살다가 간다. Life 2.0은 몸, 즉 하드웨어는 바꿀 수 없지만 뇌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고 행동과 사고를 바꿀 수 있는 존재다.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뇌를 가진 동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Life 3.0은 무엇인가. 몸도 스스로 바꾸고 정신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존재다.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만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의 전망이다. 인공지능이 언젠가 자신의 반도체 칩을 스스로 설계하고, 로봇이 자신의 팔이 약하다고 판단하면 더 강한 팔을 직접 설계하고 생산해서 교체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은 자가 발전의 고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유전자를 바꾸기 어려운 인간은 이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두려움이 여기서 비롯된다.
일론 머스크가 뉴럴링크를 통해 인공지능의 기능을 칩 형태로 인간의 뇌에 보조 두뇌로 삽입하겠다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 두려움과 무관하지 않다. 인공지능이 Life 3.0의 단계로 진입하더라도 인간 역시 유전자 편집 기술이나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자신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업그레이드하는 Life 3.0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먼 미래의 시나리오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뇌가 진화한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여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뇌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사회적 뇌의 등장이었다. 포유류로의 진화 과정에서 뇌는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관에서 타자를 인식하고, 타자의 감정과 생각을 읽고, 집단 속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기관으로 변모했다. 각자도생하던 파충류의 세계에서 새끼를 돌보고, 가족을 챙기고, 무리의 다른 구성원이 감지한 위험 신호에 집단 전체가 반응하는 포유류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200마리가 모여 사는 집단에서 한 마리가 포식자를 발견하면 공포라는 감정이 전염되어 200마리가 동시에 도망친다. 개체의 뇌가 집단의 뇌로 연결되는 순간, 생존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결국 뇌의 존재 이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다. 뇌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뇌와 연결될 수 있도록 진화한 기관이다. 이 두 가지, 자기 변화의 능력과 타자와의 연결 능력이야말로 뇌가 수억 년에 걸쳐 만들어낸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다. 그리고 바로 이 두 가지 기능이 지금 AI 시대에 가장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인간의 뇌는 약 10만 년 전부터 지금과 거의 같은 크기와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수렵 채집을 하며 동굴에 살던 시대의 뇌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현대인의 뇌 사이에 물리적인 차이는 0.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유전적 진화라는 것은 극도로 느린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명이 길고 세대 교체가 느려서, 무작위 변이가 일어나고 그것이 생존에 유리한 형질로 자리 잡으려면 수만 년이 걸린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동일한 뇌를 가지고 어떻게 인간은 아름다운 교향곡을 작곡하고, 인공지능을 만들고, 우주에 사람을 쏘아 올리는 일이 가능했는가.
답은 문화적 진화에 있다. 그리고 문화적 진화의 속도는 유전적 진화의 속도보다 수만 배 빠르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좋은 예다. 초연된 지 200년도 채 되지 않은 이 곡은 당시 유럽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너무 어렵다며 연주를 포기했던 곡이다. 두 번째로 실력이 좋다는 연주자가 간신히 초연을 했고, 그 후로도 한동안 연주 불가능한 곡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곡이 음대 입시곡이다. 사라 장 같은 연주자는 초등학생 때 미소를 띠며 이 곡을 연주했다. 한국인의 유전자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불과 5~6세대 사이에 바이올린 연습법, 교수법, 연주 테크닉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세대마다 축적되고 업그레이드된 결과다. 이것이 문화적 진화의 힘이다.
IQ라는 지표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IQ는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같은 시대, 같은 문화, 같은 국가에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대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표다. 그런데 세대 간 비교를 하면 일관된 패턴이 나타난다. 매 세대가 전 세대보다 지능 측정의 거의 모든 지표에서 더 높은 점수를 기록해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플린 효과라 불리는 이 현상의 핵심 원인은 교육과 정보 환경의 개선이다. 도서관이 세워지고 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의 뇌가 새로운 정보를 더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인간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도약한 계기를 진화인류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크게 세 번으로 본다. 첫 번째는 기록의 발명이다. 글자, 숫자, 활자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두 가지 혁명적 능력을 얻었다. 하나는 생각의 외주화다. 우리가 머릿속에서만 생각을 처리할 때는 작업 기억의 용량 한계에 부딪힌다. 복잡한 문장을 구성하거나 긴 계산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종이 위에 문장 하나를 써놓고 이어서 쓰고, 계산 중간 결과를 적어놓고 나중에 돌아와서 이어가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인간의 사고 능력은 비약적으로 확장됐다. 다른 하나는 시간과 공간의 극복이다. 기록된 지식은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고,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을 뇌의 연결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면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수렵 채집 시대 인간의 뇌가 관리할 수 있는 인맥의 한계는 약 200명이다. 수첩이나 컴퓨터 없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평균적으로 150명에서 250명 사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SNS에서 실질적으로 상호 팔로우하고 있는 관계의 수도 대략 이 범위 안에 들어온다. 던바의 수라고도 불리는 이 숫자는 동굴에 모여 살던 시절 인간 뇌의 사회적 연결 용량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기록이라는 기술이 등장하면서 200명의 뇌가 다음 세대 200명의 뇌에 지식을 전달하고, 그것이 다시 축적되면서 400명, 800명, 수천 명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불과 수천 년 만에 그리스 로마 문명, 이집트 문명, 중국 문명이 꽃피고 도서관과 학교가 세워진 것은 이 연결의 폭발적 확장 덕분이다.
두 번째 도약은 인터넷 혁명이다.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온라인에서 인류가 축적한 거의 모든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1969년 아폴로 계획에서 달에 인간을 보내기 위해 동원된 모든 슈퍼컴퓨터를 합친 것보다 100배 이상 강력한 컴퓨터를 지금 우리 모두가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20만 년 전 인류의 시선으로 보면 지금의 스마트폰 하나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슈퍼컴퓨터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아무리 많은 정보가 디지털화되어 있어도 인간의 뇌가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의 총량에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파고가 일주일이면 인류가 수천 년간 축적한 거의 모든 바둑 기보를 학습할 수 있는 반면, 인간의 뇌는 한 사람의 생애 동안 그 극히 일부만을 소화할 수 있을 뿐이다.
세 번째 도약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AI 혁명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지식과 정보를 AI에게 학습시키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수학이든, 의학이든, 법률이든, 어떤 분야의 전문 지식이라도 AI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돌아가신 위인들과도 사실상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바흐가 어떤 음악적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인슈타인이라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했을지를 AI 시뮬레이션을 통해 물어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만날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개인 과외를 받을 수 있다는 비유가 과장이 아닌 세상이다.
이 세 번의 혁명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하나다. 연결이다. 뇌와 뇌의 연결 숫자가 늘어날수록 인류의 능력과 창의성과 혁신이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이 연결이 끊기면 그 결과는 가혹했다. 이란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문화와 기술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에 견줄 만큼 발전했던 나라였으나, 극단주의 정권이 자유를 억압하고 지식과 정보의 교류를 차단하면서 급격하게 후퇴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내부에 사일로가 형성되어 부서 간 경쟁이 외부 경쟁보다 치열해지면 혁신은 멈춘다. 연결이 자유로우면 발전하고, 연결이 끊기면 퇴보한다. 이것은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변하지 않는 원리다.
CES에서 삼성이 별도의 행사장을 마련하고 수많은 기업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단순한 가전 기업이 아닌 서비스 생태계의 허브로서의 비전을 보여준 것도, SXSW에서 분야를 초월한 연결이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AI 시대에 하나의 기업이 수십 년간 해오던 방식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생태계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연결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생존의 관건이 됐다.
그러나 연결에는 반대편도 존재한다. AI를 통해 역사상 가장 많은 뇌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동시에, 골방에 앉아 AI하고만 대화하며 인간과의 접촉을 끊는 완전한 고립의 가능성도 함께 열렸다. 연결 가설의 논리를 따르면 후자의 경로는 인간 능력의 퇴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두 갈래 길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그 분기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갈린다.
19세기 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류의 미래를 두 가지 유형으로 그렸다. 하나는 초인, Übermensch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되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실패를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기존에 없던 가치를 창조해내는 존재다. 다른 하나는 최후의 인간, Last Man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것만을 추구하고,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선호하며, 누군가 앞서 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새로운 길을 걷는 고통을 거부하는 존재다. 니체의 서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초인이 되라고 설파하면서 최후의 인간의 모습을 경고로 보여주었을 때, 대중이 보인 반응이다. "우와, 저게 되고 싶다." 편안하고 안락하게 가고 싶다는 것이 대중의 솔직한 욕망이었다.
이 140년 전의 우화가 지금 AI 시대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재현되고 있다. 2025년 SXSW에서 뇌과학자들과 AI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AI를 사용하는 인류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는 것.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과 보스턴컨설팅그룹이 170명의 컨설턴트를 대상으로 진행한 공동 연구가 이 분기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연구진은 AI를 사용하는 컨설턴트들을 두 유형으로 분류했다. 센타우르 그룹과 사이보그 그룹이다.
센타우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반인반수다. 말의 신체 능력과 인간의 지성을 동시에 갖춘 존재다. 센타우르 그룹의 컨설턴트들은 자신이 가진 전문성, 판단력,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AI를 보조 도구로 사용했다. 이들에게 AI는 자신의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증폭시키는 수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그룹의 성과는 인간의 능력과 AI의 능력을 단순히 더한 것보다 높았다. 일종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 현대적 표현으로 슈퍼휴먼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
이 슈퍼휴먼의 모습은 이미 실리콘 밸리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세 명의 창업자가 AI 에이전트 수백 개를 운용하면서 수조 원 규모의 밸류에이션을 달성한 스타트업이 등장했다. AI가 수면의 질을 최적화해주고, 시간 관리를 도와주고, 리서치를 대행하면서 개인의 생산성이 40퍼센트 이상 향상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한 사람이 AI 에이전트를 지휘하며 과거에는 수십 명이 필요했던 업무를 처리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반면에 사이보그 그룹은 다른 경로를 걸었다. 이들은 AI에 의사 결정을 기계적으로 위임하고 자신은 생각하지 않았다. AI가 내놓은 결과를 검토하거나 비판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마치 로봇처럼 입력과 출력 사이에서 자신의 사고를 개입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 그룹의 성과는 오히려 하락했다. AI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치가 떨어진 것이다. 니체의 최후의 인간이 디지털 시대의 의상을 입고 다시 나타난 셈이다.
이 분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마태 효과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이 현상은 교육학에서 오래전부터 관찰되어 왔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시절에 어휘력과 문해력에서 생긴 작은 차이가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 거대한 격차로 벌어진다. 어릴 때 책 읽기를 좋아한 아이는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어휘를 쌓고, 그것이 다시 더 깊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에 진입한다. 반면에 책 읽기를 어려워하고 기피한 아이는 그 격차가 해가 갈수록 벌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처음의 조그만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복리처럼 불어나는 것이다.
AI 시대에 이 마태 효과는 전례 없는 규모로 작동하고 있다. AI 도구를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슈퍼휴먼이 되어가는 사람들과, AI에 수동적으로 의존하면서 인지 능력이 퇴화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바이올린 연습법이 세대를 거듭하며 축적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격차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세대의 차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AI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가장 크게 누리는 집단은 두 곳이다. 하나는 이미 자기 분야에서 충분한 전문 지식과 경험을 쌓은 중장년 세대다. 이들은 AI를 통해 자신의 기존 역량을 증폭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다른 하나는 태생적으로 AI와 함께 자란 AI 네이티브 세대, 지금의 중고등학생과 대학 신입생들이다. 이들은 AI를 사용하는 데 있어 이전 세대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게 적응한다.
가장 힘든 위치에 놓인 것은 그 사이에 낀 세대다. 갓 직장에 들어온 사회 초년생, 대리급 직원, 대학을 막 졸업한 취업 준비생들이다. 윗세대는 AI를 통해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며 주니어에게 일을 맡겨 가르치는 대신 AI를 사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AI 네이티브 세대가 올라오고 있다. 경험을 쌓아 실력을 키워야 하는 시기에 그 기회 자체가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AI 시대의 마태 효과는 단순히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 기회의 구조적 불균형이라는 더 깊은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은 초인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최후의 인간의 편안함을 선택할 것인가. 다만 니체의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 선택의 결과가 개인의 철학적 태도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능력의 격차로, 경제적 가치의 격차로, 나아가 사회 구조의 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UC 버클리의 연구자가 2025년 SXSW에서 아직 정식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를 공유하면서 전한 소식은 이것이었다. 인류 최초로 다음 세대의 인지 능력이 전 세대보다 떨어지고 있다는 것. Z세대와 알파 세대를 대상으로 한 측정에서 집중력, 기억력, 이해력, 공감 능력이 이전 세대보다 낮게 나타났다. 수천 년 동안, 적어도 체계적인 측정이 시작된 이래로 매 세대가 전 세대보다 더 높은 인지 지표를 기록해왔던 상승 곡선이 처음으로 꺾인 것이다.
이 현상의 원인을 놓고 과학자들 사이에서 혼란이 있지만,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가설은 디지털 스크린 타임의 영향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섯 살 이전에 디지털 스크린에 대한 노출 시간이 많았던 아이들의 뇌에서 40군데가 넘는 영역에서 신경 연결이 감소하는 현상이 관찰됐다. 뇌과학에서 brain atrophy라 부르는 현상, 신경세포가 쪼그라들고 줄어드는 현상이 실제로 발견된 것이다. 숏폼 콘텐츠를 많이 시청하는 것이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들이 축적되고 있고, 스마트폰 중독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뇌 위축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들이 AI 사용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에도 더 취약하다는 상관관계가 보고되고 있다.
80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후속 연구는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준다. 모든 사람의 뇌가 동일하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스마트폰 중독과 AI 의존에 의해 뇌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두 그룹이 특정됐다. 첫째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들이었고, 둘째는 삶의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고립감isolation과 목적 상실lack of purpose, 이 두 가지가 AI 시대 뇌 퇴화의 최악의 촉진 요인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통계적 상관이 아니라, 뇌의 작동 원리로 설명이 가능한 인과적 메커니즘이다. 니체가 남긴 흥미로운 일화가 이 메커니즘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니체는 처음에 손으로 직접 글을 쓰다가, 세계 최초의 타자기를 배워서 타자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 시력이 더 나빠지자 비서에게 구술하여 받아적게 했다. 1882년 니체가 타자기로 글을 쓰면서 남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의 생각과 사고가 내가 사용하는 도구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손으로 쓸 때와 타자기로 쓸 때와 구술할 때 다른 문장이 나온다.
이 관찰은 뇌과학적으로 정확하다. 인간의 뇌는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에 따라 실제로 재편된다. 구글 검색이 있으면 뇌는 정보 자체를 기억하는 대신 정보가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를 기억하는 쪽으로 전환한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면 해마의 공간 기억 기능이 약화된다. 런던 택시 기사들의 해마가 일반인보다 크다는 유명한 연구는, 반대로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면 해마가 작아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계산기가 있으면 뇌는 암산 능력에 투자하지 않는다. 뇌는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외부 도구가 대신해주는 기능에는 자원을 배분하지 않는 것이다.
AI는 이 원리를 전례 없는 규모로 작동시키고 있다. MIT에서 진행한 연구가 이를 보여준다. 한 그룹은 AI를 사용하여, 다른 그룹은 구글 검색을 이용하여, 또 다른 그룹은 책을 읽고 자기 기억에 의존하여 에세이를 작성했다. AI를 사용한 그룹은 뇌를 40퍼센트 더 적게 사용한 것으로 측정됐다. 누군가는 이것을 효율성의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뇌를 덜 쓰고도 비슷한 품질의 결과물을 냈으니 더 효율적인 것 아니냐는 논리다. 그러나 2주 후에 실시한 후속 테스트에서 진짜 문제가 드러났다. 자신이 작성한 에세이에 어떤 내용을 썼는지,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를 묻는 테스트에서 AI를 사용한 그룹의 오답률이 80퍼센트에 달한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했는지 자신이 모르는 상황. 상사가 "지난번 보고서에서 네가 쓴 핵심 논지가 뭐였지?"라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이 현상에 최근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인지적 근손실이다. 우리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줄어드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인지 기능이 위축되는 현상이다. 근력이 건강한 삶의 기반이듯, 인지적 근력은 생각하고 소통하고 판단하는 삶의 기반이다. 그리고 이 인지적 근력은 사용하지 않으면 줄어든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약해지고, 이해력이 감소하고, 기억력이 저하된다. Z세대와 알파 세대에서 관찰되고 있는 인지 지표의 하락이 바로 이 인지적 근손실의 세대적 발현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의 외주화, 즉 cognitive offloading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글자의 발명도 생각의 외주화였고, 계산기의 등장도 생각의 외주화였다. 그러나 AI가 가져온 인지적 외주화의 범위와 깊이는 차원이 다르다. 이전의 도구들은 특정 영역의 인지 기능을 대체했지만, AI는 사고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범용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문제를 정의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표현하는 전 과정을 AI에 위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감정적, 영적 영역까지도 외주화가 시작되고 있다. 부부 싸움 후의 중재를 AI에게 맡기고, 삶의 목적을 AI에게 물어보고, 로맨틱한 감정을 AI 대상으로 느끼는 현상이 이미 관찰되고 있다. 미국 10대 청소년의 72퍼센트가 생애 처음으로 로맨틱한 설렘을 느끼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AI라는 조사 결과는 이 변화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보호 요인도 존재한다. 마인드풀니스, 즉 현재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 높은 사람은 AI를 사용한 이후에도 뇌가 퇴화하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발견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AI 사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AI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얼마나 주체적으로 유지하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생각 없이 AI의 출력을 그대로 소비하는 것과, AI의 출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병행하는 것 사이에는 뇌에 미치는 영향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자본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경제적 자본, 사회적 자본, 그리고 문화적 자본이다. 경제적 자본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돈이다. 사회적 자본은 인간관계의 네트워크, 누구를 알고 있고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의 문제다. 문화적 자본은 교육과 문화적 소양을 통해 축적되는, 세상을 해석하고 가치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AI 시대에 이 세 가지 자본의 위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
경제적 자본부터 보자. 일론 머스크가 올해 초에 던진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돈이라는 것의 가치가 전반적으로 0에 수렴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현상을 들여다보면 일정 부분 논리적 근거가 있다. 금도 오르고, 비트코인도 오르고, 부동산도 오르고, 주식도 오른다. 1년 만에 부동산 가격이 두 배로 뛴 곳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이 자산들의 본질적 가치가 올라간 것일까. 비슷한 현상이 한국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자산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AI가 생산, 노동, 창작 영역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의 비용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고, 이는 기존에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측정되던 가치 체계를 흔들고 있다.
반면에 사회적 자본의 가치는 AI 시대에 전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 능력의 핵심 동력은 연결이었다. AI가 대부분의 정보 처리와 생산 활동을 대행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질적 연결을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더욱 희소해지고 따라서 더욱 가치 있어진다. 누구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느냐, 어떤 네트워크에 속해 있느냐,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느냐가 경제적 자본 못지않은, 어쩌면 그것을 넘어서는 자본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변화는 문화적 자본의 부상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한 시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 누구와 함께 그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문화적 자본의 본질이 드러난다. 돈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고, 비즈니스상 유용한 인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임윤찬 피아니스트와 식사를 할 수 있다면, 혹은 자기 분야에서 경이로운 수준에 도달한 예술가나 운동선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본연적 가치가 문화적 소양을 가진 사람에게서 발산되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025년 SXSW에서 한 발언이 이 맥락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30년 넘게 영화를 만들어온 그에게 기자가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스필버그는 이렇게 답했다. 불이 꺼진 순간 한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인간을 연결하는 엄청난 힘이 있으며, 자신에게는 그 연결이 항상 가장 중요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영화만이 아니라 오페라도 발레도 마찬가지라고.
뇌과학은 이 직관을 데이터로 뒷받침한다. 공연장에서 발레를 관람한 사람들의 공감 능력이 측정 가능한 수준으로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같은 발레를 집에서 OTT로 시청한 경우에는 이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물리적 공간에 함께 모여서 같은 예술적 경험을 공유할 때, 뇌과학에서 neural coupling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어난다. 개인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같은 음악에 감동받고 같은 공연에 몰입할 때, 이들의 뇌파가 동기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와 하프가 전혀 다른 원리로 소리를 내지만 같은 음을 연주할 때 공기의 진동수가 일치하여 화음과 공명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같은 경험을 공유할 때 뇌 전체의 동기화가 일어나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관용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미술 시장의 데이터도 문화적 가치의 독특한 위상을 보여준다. 금, 부동산, 주식, 암호화폐 등 거의 모든 자산 시장이 등락을 반복하는 동안, 반 고흐나 살바도르 달리 같은 대가의 미술 작품 시장은 지속적으로 가치가 상승해왔고 의미 있는 하락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극소수만이 접근 가능한 시장이기에 일반적 투자 대상으로 논하기 어렵지만, 이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오랜 교육과 문화적 소양을 통해서만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가치,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 가치는 시대가 변해도 그 본질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AI 시대에 대부분의 데이터화 가능한 가치, 정량화할 수 있는 가치는 AI에 의해 아웃소싱되고 있다. 정보의 수집과 분석, 문서의 작성, 디자인, 심지어 작곡과 코딩까지 AI가 처리하는 세상에서, AI에 일을 시키고 나서 인간에게 남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의 깊이, 관계의 질, 그리고 삶을 해석하는 프레임의 풍요로움이다. 문화적 자본이야말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자본이며, AI 시대에 그 가치가 역설적으로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논의는 국가의 차원으로도 확장된다. AI 기술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새로운 정치적 분기선이 되고 있다. 중국은 국민의 87퍼센트가 AI 기술에 포용적이다.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 기술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겠다는 쪽이다. 반면에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80퍼센트 이상의 국민이 AI 없는 삶을 선호한다. 와인을 마시고 책을 읽고 산책하는 삶이 더 가치 있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한동안 AI 위험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으나, 현실적 경쟁 압력 속에서 중국 모델에 가까운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이 두 모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한국은 AI를 포용하되, 혼자서 가려 해서는 안 된다. 전 세계 35세 미만 젊은 인구의 거의 90퍼센트가 20년 후에는 인도, 동남아, 중동, 남미, 아프리카 등 글로벌 사우스에서 나온다. 한국은 인구가 줄고 있지만, K-컬처를 통해 전 세계에서 한국의 호감도가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최대한 많은 나라와 연결을 만들어야 할 때다. 과학 기술을 베풀고 함께하는 데 문화적 자본이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미래학자 짐 디데리오가 한국이 AI 시대에 최적화된 인구 구조를 갖고 있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노동과 생산이 AI로 대체되면 대규모 사회적 혼란이 불가피하지만, 한국은 AI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줄어드는 인구를 AI와 로봇이 보완하는 구조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인구 만 명당 로봇 보유 대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AI라는 슈퍼카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테슬라보다 좋은 성능의 슈퍼카다. 그런데 이 슈퍼카를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둘로 나뉘고 있다. 한쪽은 직접 운전석에 앉아 슈퍼카의 모든 기능을 숙지하고 목적지를 설정하며 주체적으로 운전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쪽은 조수석에 올라타 자율주행을 켜놓고 자기가 운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AI가 생성한 결과를 복사해서 붙여넣기만 하면서 자기가 만들었다고 믿는 현상이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가 "선생님, 제가 이 게임 만들었어요"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한 일은 프롬프트 한 줄을 입력하고 엔터를 누른 것이 전부인 경우가 점점 흔해지고 있다.
운전자가 되느냐 탑승자가 되느냐를 가르는 핵심은 하나다. 자신이 먼저 생각하느냐의 여부다. AI에게 질문을 던지기 전에 스스로 초안을 써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AI가 돌려준 결과를 읽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필요하면 다시 쓰는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인지적 근손실을 피할 수 있다. 반대로 AI의 출력을 검토 없이 그대로 소비하는 사람은 뇌의 능력이 점진적으로 퇴화한다. AI를 회장님처럼 쓰라는 비유가 이 핵심을 잘 포착한다. 유능한 경영자는 여러 부서의 보고를 받되, 아무리 신뢰하는 참모의 보고라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여러 소스의 보고를 비교하고, 자신의 판단을 거쳐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다. AI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AI의 답변을 교차 검증하고, 최종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 슈퍼카의 운전자가 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가치가 올라갈 뇌의 능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다섯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문제를 찾는 능력이다.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좋은 질문을 하는 능력의 핵심은 문제 자체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선생님이 수학 문제를 냈을 때 "선생님, 이 문제의 조건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지적할 수 있는 학생은 주어진 문제 안에서 답을 찾는 학생과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AI 시대에는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는 AI가 풀어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발견하고,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이다.
둘째는 맥락적 유연성이다. AI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도 모델마다, 시점마다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답이 나오기도 한다. 이 모순을 견디면서 왜 다른 답이 나왔는지, 각각의 답이 어떤 맥락에서 타당한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맥락적 유연성이다. 하나의 정답만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으로는 AI 시대의 복잡성을 다룰 수 없다. 실무적으로 이것은 여러 AI를 교차 활용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ChatGPT의 답을 Claude에게 검토시키고, Claude의 답을 Grok에게 검토시키고, 그 결과를 다시 Gemini에게 확인하는 과정을 두 바퀴 정도 돌리면 어느 한 AI의 환각에 속을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고, 사람이 혼자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입체적인 답에 도달할 수 있다. 시간은 들지만, 다양한 AI가 각각 내놓은 답을 비교하고 취합하여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셋째는 내러티브 크리에이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AI는 모든 시나리오, 모든 시뮬레이션의 데이터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데이터가 나에게, 우리 조직에,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해석하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다. 오픈AI를 포함한 실리콘 밸리의 주요 기업들이 연봉 4억, 5억 원에 스토리텔러를 찾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이터와 AI의 시대에 왜 스토리텔러가 필요한가. AI가 쏟아내는 방대한 데이터와 분석 결과에서 의미를 추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서사로 구성하는 능력이야말로 AI가 대체하기 가장 어려운 인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생각을 묵히는 능력이다. 뇌과학에서 인큐베이션 효과라 부르는 현상이다. 우리는 즉각적인 답을 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AI가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 환경에서 생각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라는 조언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뇌과학의 연구 결과는 일관되게 보여준다. 성급한 확신은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습해야 하는 비용을 키운다. 생각을 묵혀두고 숙성시킬 때 비로소 표면적 사고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의 통찰이 떠오른다. 묵은지에서만 나오는 맛이 있듯, 묵힌 생각에서만 나오는 아이디어가 있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 리트머스 반응 대신, 의도적으로 다섯 발짝을 더 걸어보는 것이 AI 시대에 오히려 더 필요한 사고 습관이다.
다섯째는 사람을 읽는 능력, 공감적 직관이다. 방 안의 공기를 읽고, 말하지 않은 상대방의 감정과 의도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AI가 이 영역에서 무력한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의 미세한 표정 변화, 목소리의 떨림, 시선의 방향, 몸짓의 뉘앙스 등을 종합적으로 읽어내고 그 이면의 감정과 맥락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가 AI의 학습 데이터에 충분히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현 시대에 가장 스마트한 사람의 조건으로 데이터를 다루는 직관과 따뜻한 공감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을 꼽은 것도 같은 인식에서 나온 발언이다.
이 다섯 가지 능력은 결국 하나의 원리로 수렴한다. 인간의 뇌는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고, 사용하면 강화된다. 그리고 뇌를 가장 강력하게 트레이닝시키는 것은 인간관계다.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자신의 뇌를 연결하고 맞추는 것은 뇌 입장에서 극한 노동이다. 우리는 매일 정신적 육체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 물동이를 지고 2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던 육체 노동을 자동차와 경운기가 대체해준 것처럼, 앞으로는 맞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설득, 의견이 다른 동료와의 조율 같은 정신적 노동을 AI가 대신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정신적 근육이 퇴화한다.
고조할아버지에게 헬스장 연간 회원권을 끊었다고 말하면 왜 돈을 주고 힘든 일을 사서 하느냐고 이해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일상 자체가 육체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건강을 위해 의도적으로 운동한다. 마찬가지로 AI 시대에는 사고 능력과 공감 능력의 퇴화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뇌를 훈련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 브레인 짐이라는 개념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미 브레인 짐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자리, 회사에서의 대면 업무, 가정에서의 일상적 소통이 모두 브레인 짐이다.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뇌가 강하게 트레이닝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인간관계를 더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윤활유가 바로 문화적 경험이다. 예술을 함께 경험하고 나면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부드러워지고, 뇌파가 동기화된 상태에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AI 시대의 역설은 이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적인 것의 가치가 올라간다. AI가 더 많은 것을 해줄수록, AI가 해줄 수 없는 것의 희소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AI가 해줄 수 없는 것의 목록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 포함된다. 사람을 읽는 능력, 사람과 공감하는 능력, 사람과 협업하는 능력,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능력. 이 모든 것은 뇌가 수억 년에 걸쳐 진화시켜온 가장 고도의 기능이며, 동시에 사용하지 않으면 가장 빠르게 퇴화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명확하다. AI라는 슈퍼카의 운전석에 앉아 자신의 뇌를 주체적으로 가동하면서 AI를 도구로 활용하는 초인의 길이 있다. 조수석에 앉아 AI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의 사고를 방치하는 최후의 인간의 길이 있다. 그리고 이 선택의 결과는 바이올린 교수법이 세대를 거듭하며 축적된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마태 효과의 논리를 따라 격차를 벌려갈 것이다. 10만 년 전 동굴에서 별을 올려다보던 뇌와 물리적으로 같은 뇌를 가지고 우리는 오늘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연결할 것인가, 단절할 것인가. 생각할 것인가, 외주할 것인가. 그 선택이 다음 세대의 뇌가 어떤 모습이 될지를 결정한다.
이 강연을 듣고 나서 드는 생각은 하나다. 결국 AI를 300개 넘게 운용하든, 한 개를 쓰든 핵심은 같다.
도구가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에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생각하는 습관'이고,
키워야 할 것은 '연결하는 근육'이다.
뇌과학자의 언어로 풀어냈을 뿐, 우리가 매일 현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