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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04. 2020

34. 모든 사람이 어정쩡해지는 시간.

어느새 연말이 돌아왔다.

성탄을 기념하는 반짝거리는 일루미네이션. 따스한 캐럴. 빛나는 웃음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더욱 의미 있고 행복한 기간이지만, 동시에 다른 어느 때보다 슬픈 시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게 가장 몸에 와 닿는 순간이니까.

모두들 잔뜩 기대를 안고 올해의 성취를 축하한다.

누구는 지갑 한가득 성과급을 타고, 어디에 누군가는 올해 자신이 갱신한 자격증이 몇 개인지 세며 즐거워한다.

물론 나는 지갑 한 가득 받을 성과급도 없고, 다른 사람에 뒤처지지는 않을까 남들 다한 자격증 사이트만 뒤지다 한 해가 다 갔는데.

참 볼품 없어진다. 무언가 잘했다고 나를 도담일 것 하나도 없는 연말이다.

 

기쁜 연말, 자신이 이룬 것을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랑해도 되는 순간.

오프라인의 왁자지껄한 대단한 이들의 피로를 피해 핸드폰과 컴퓨터를 벗 삼으면 괜찮을까 하지만 무른 생각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올해의 그림을 모아 자신의 성과를 돌아보는 일러스트레이터들.

유튜브에서도 자신이 올해 실버 버튼을 받았다, 골드 버튼을 받았다. 구독자가 몇만을 넘었다 커뮤니티가 시끄럽다.

TV에서는 한껏 식상해졌지만 오늘도  익숙한 얼굴들이 자신의 위대한 작품을 대신해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나는 그냥 집구석에서 의미 없는 클릭을 반복할 뿐이다.


참 볼품없어진다. 캐럴이 커질수록 볼품없는 모양새는 커져 성냥팔이 소녀처럼 없는 살림에 작은 행복을 위로 삼아 생각해본다.

‘그래도 올해는 다치지는 않았잖아’ ,’그래도 돈은 좀 아꼈네.’ 뭐 내가 아니어도 다들 다발로 가지고 있는 자랑들을 품에서 꺼내어본다.

물론 결말은 동화처럼 금세 위로의 불꽃은 꺼지고 차가운 현실만이 가슴을 에인다.


‘내년 계획을 세워도 결국 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전 일을 생각해봤자 우울해지고 마니, 새 다이어리를 사서 기분을 내며 첫 장을 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든다.

매년 학습되어버린 실망감, 열등감, 후회가 뒤섞여 요 몇 년 사이에는 새로운 기분을 내기도 힘들어진다.

계획하지 않으면 실망하진 않을 거 같다며 은근슬쩍 해가 밝기도 전에 도망가려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 매 해가 반복되었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르다. 뭔가 그래도 내년에는 더 괜찮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올해보다는 나을 것 같다. 뭔가 그래도 내가 수고한 느낌이 든다.

평범한 연말의 느낌이다.

굉장히 어색한 연말의 기분이다.


갑자기 긍정적인 사람이 된 건 아니다.

뭐 엄청 크게 성취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정쩡한 나는 그대로다.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다.

변한 건 내가 아니라 환경뿐이다.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한 해다.

바이러스가 사람들의 일상을 얼리다 못해 굳혀버렸고, 모두가 힘든 하루를 버틴다.

버틴다. 버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고 10개월이 지났다.

모두의 시간이 멈췄고 모두에게 행복한 성취가 몇 없이 2020년이 저물었다.

어떤 성취도 없이 많은 이들의 눈물만 흐르며 한 해가 흘렀다.


나는 다른 해와 똑같이 아무것도 못했는데, 모두가 같이 어정쩡해져버렸다.

이기적 이게도 나는 내 무력감이 조금은 덜어진 듯한 기분이 든다. 참 못됐지만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희망이다.

물론 버려진 한 해를 생각하면 내일 한 숨이 나오고, 마스크 안의 보푸라기가 코를 간질이면 마스크에 분풀이를 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모두가 2021년이 아닌 또 다른 2020년을 원하고 있는 요즘, 가슴이 조금은 시원하다.


나만 멍청히 멈춰있는 한 해는 아니었구나.

올해만큼은 모두가 멈춰있었구나.

안도감과 함께 참 오랜만에 내년의 계획을 세워볼 생각이 든다.

올해 모두가 나만큼 어정쩡하게 멈춰버린 시간을 가졌으니 내년에는 나도 다른 이들과 발맞춰 성취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희망이 몇 해만에 드는 연말, 서점에서 플래너를 사봐야겠다. 조금 더 화사하고 밝은 것으로.

내년을 기대하며 계획을 짤 수 있을만한 것으로.


바라건대, 내가 무력감에 젖어 있던 발을 내년에는 뗄 수 있기를.

모두의 무력하게 젖은 발이 떨어질 수 있는 내년이 되기를.


내 이기적인 감상을 덜어내기 위해 작게 고개를 흔들며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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