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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23. 2020

53. Dejavu

이상하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글이다.

내 이전 글들 중에 이런 글이 있었을까?

어디라고 확신은 못하지만 분명히 쓴 적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생각이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어째서인지 ‘비슷한 글을 썼다’라는 생각만 막연히 들뿐이다.

‘아무래도 기분 탓일 거야. 다들 비슷한 글을 느낌만 바꾸어 쓰는 걸.’

애써 괜찮다 생각하며 글을 다시 쓰려고 한다.

이상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글, 괜찮았던 소재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글로 보인다.

문장의 앞 뒤도 이상하고, 글의 설득력도 없다.

아까까지 신이 나서 쓰던 글이 어디서 염소가 씹다 뱉은 종이처럼 볼품없어졌다.


어쩔 수 없다. 종이를 찢고 다시 처음부터 쓰는 수밖에.

이런 글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어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면 쓸수록 더욱 데자뷔는 심해진다.

리뷰를 쓸 때마다, ‘내가 이런 감상을 이전에 쓴 적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여행기를 쓸 때면, ‘이런 비슷한 감상을 분명 이전에 쓴 적이 있을 거야.’라는 묘한 확신이 생긴다.


소설을 쓸 때면 더욱 심해진다.

‘이 캐릭터는 분명 이전에 본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따오게 된 거 같은데.’

‘이 플롯도 예전에 본 어떤 책에 있던 걸 가져온 거 같아.’

사실 확실히 어떤 것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냥 그런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든다.

기시감은 가면 갈수록 내 글을 내 것이 아니게 되게 하고, 내 마음에서 내 글을 밀어내게 만든다.


또다시 글을 지우고 쓰게 된다. 완벽하게 새 글을 써야만 한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완벽히 새로운 창작이 없음을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된 내 글을 가만히 둘 수 없다.

한 번 썼던 형용사는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한다. 두 번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은 무슨 수를 써도 안된다.

글이 늘 너무 길었던 것 같다. 글의 길이를 이번엔 조금 짧은 템포로 끊어보려 한다. 잘 되지 않아도 어떻게든 해보려 한다.

주제가 겹치는 게 있지는 않을까, 흐름 상 지금 글이 혼자 툭 튀지 않을까, 시간이 날 때마다 이전에 썼던 글까지 다시 읽는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부족해진다.


이렇게까지 하면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썼던 글을 수십 번 검토까지 했으니 점점 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무슨 전염병처럼 한 번 시작된 데자뷔는 내 다른 글에 옮겨붙는다.

소재가 겹치진 않을까 이전에 쓴 글을 읽다 보면 그 글조차 어디선가 읽어보았던 것만 같다.

어딜까, 이 글을 어디서 본 적이 있을까. 상상일지, 현실일지 확신도 못하지만 분명해진 것은 하나 있다.


이제 내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확인 차 읽은 글도 햄스터가 갉아먹은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더 이상 이 글도 누군가에 앞에 낼 수 없다. 도미노가 쓰러지듯 모든 글에 데자뷔가 옮겨붙는다.


이제 내 글에 닥친 운명은 하나뿐이다. 모두 데이터의 잿더미로 날려지가,

하나하나 글을 쓴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글을 땜질해 세상에 내놓는 방법이다.

어떤 방법이던, 내가 처음 쓰려고 했던 글은 남지 않는다.

이젠, 겹치지 않기 위해 비틀며 쓴 뭔가 알 수 없이 현학적이고 안 쓰는 형용사만 가득 찬 글 무더기가 될 뿐이다.


그 글 무더기를 고칠 기운도, 시간도 남지 않아 다시 업로드할 때 나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내가 봐도 너무 못쓴 글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우고 다시 쓸 기력도 남지 않아서 펜을 놓는 것뿐이다.


바라건대  ‘누군가 이 글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기를.’

더럽게 못썼다고는 말해줘도 괜찮으니, 제발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글이라 말만 해주지 않기를.

이 글마저 지워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글을 업로드한다.


예뻐지려다 되려 기이하게 어정쩡해진 내 글, 나조차 사랑하지 못한 내 글만이 게시판에 덩그러니 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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