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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Dec 24. 2020

54. 동경에 갇히다.

꿈을 꾼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구체적인 상상력과 의지의 집합이다.

그만큼 꿈은 꾸는 것 자체로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있을수록 꿈은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단순히 ‘멋진 뮤지션이 된다’보다 ‘Queen과 어깨를 나란히 할 록 뮤지션이 되겠다.’가 훨씬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꿈을 꿀 수 있는 건 당연하다.

그 구체적인 일념이 사람을 지치지 않고 한 곳에 몰입하게 하고, 포기했다가도 결국 잊지 못하고 꿈으로 돌아오게 되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얄궂게도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그리면 그릴수록 꿈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하기 쉬워진다.

동경하는 대상이 너무 먼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그 사람을 쫓기 위해 흉내 내고 연습하고 꿈을 그리며 연습을 하는 것은 즐겁지만, 그 사람과 진정 가까워지려 하면 넘을 수 없는 벽만이 내 앞을 가린다.

수많은 명작들, 그 사람만의 개성이 담긴 스킬, 다른 이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아무리 따라 해 보아도 다가가기 힘들단 것만 재차 느끼게 된다.


수많은 날 헤밍웨이를 동경해 헤밍웨이의 책을 들여다본다 해도 내가 헤밍웨이가 될 수 없다.

수없이 임재범이 되고 싶어 곡을 연습해봐도 그와 같은 무대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무력감이 몰려온다. 정말 될 만한 떡잎은 이 상황까지도 즐긴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떡잎은 아닌 것만 같게 느껴진다.


어쩌면 동경, 혹은 목표가 되는 대상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더 힘이 빠졌을지도 몰라.

이젠 동경하던 이들의 작품을 일부러 구석으로 밀어놓고 내가 느끼는 대로 연습해본다.

마음 가는 대로 내 창작욕을 풀어두고 습작을 만들어가며 한바탕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번엔 뭔가 나도 창작을 한 것 같은데?’ 뭔가 한 발짝 성장한 듯 해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습작을 복기한다.


내 동경의 대상이 초기에 담던 감성이 왠지 습작에 오롯이 담겨있다. 생각한 적도 없는데 어느샌가 그렇게 되어있었다.

다시 한번 아예 다르게 해 보겠다며 새로 습작을 만들어본다.

이번엔 어정쩡하게 요즘 트렌드가 첨가가 되었을 뿐이다. 무슨 새로운 맛이라고 홍보하는 옛날 과자 같이, 누가 봐도 내 것은 아니다.

어떻게 몇 번을 시도해도 내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마치 옷 입기 놀이처럼, 내가 닮고 싶던 그 사람의 모습 위에 트렌드만 연신 갈아 끼고 만다.

그냥 삼류 아류작이다. 제대로 따라 하지도 못하는 그런 모양새다. 알맹이에는 내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사람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그 사람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성과를 내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그 사람을 보고 꿈을 키운 나머지 영혼마저 비슷하게 닮아버렸다.

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영혼의 색만큼은 달라야 한다. 창작을 하는 자신의 색은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동경하던 그 사람의 물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서 어디까지 물드는지도 몰랐다. 깨닫고 보니 이미 늦어 내 영혼은 얼룩덜룩 동경하는 이의 빛깔이 물들어버렸다.


차라리 물들 거면 완벽히 물들면 좋을 걸 그랬다. 완벽한 모방은 또 하나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게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완벽한 모방이 원본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는 것이고.

하지만 나는 얼룩덜룩하다. 완벽하게 흉내도 내지 못하고 나만의 색깔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도 없다.

그냥 이런저런 여러 동경하는 이의 색이 지저분하게 물든 모양새일 뿐이다.

펜을 들면 지금도 동경의 얼룩이 뚝뚝 묻어 나온다.


모방을 하고 싶어서 동경했던 것이 아닌데.

단지 그 사람처럼 많은 이에게 박수받을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아예 물을 빼보자고 꿈을 잠시 내려놓고 돈을 벌며 살다가도 어느샌가, 또다시 너무 그 사람이 멋있어서 돌아와 버리고 만다.

나는 이렇게 그 사람스러운 삼류작만 만들게 되는 걸까.

이런 식으로 사람같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말이다.


‘야 이 사람 새 작품 좀 봐봐. 역시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

‘이 사람처럼 해보고 싶다’

동경하던 어린 내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어제 또 신작이 나왔다며 즐거워하며 다른 이에게 권하던 내가 어른댄다.


그 사람처럼 자기 빛깔 나는 작품을, 삶을 만들고 싶다. 

문득 '처음부터 동경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든다.

나는 동경하는 사람의 영향력에 갇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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