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덩치가 큰 편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면 높은 확률로 ‘정말 크시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운동선수를 할 만큼 거대하진 않지만, 약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어디서 사이비 종교의 권유도 받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 내가 생각해도 나는 몸이 참 약했다.
만성 비염이 심해질 때면 눈코입이 다 간지러운 건 이제는 일상이요.
편도가 붙는 것도 분기에 한 번은 있는 연례행사다.
관절도 약해서인지 자주 삐고, 낫는 것도 잘 낫지 않는다.
겨울만 되면 또 손발은 왜 그렇게 찬 지. 내 손에서 찬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
몸의 크기가 크면 튼튼할 것이다라는 직관적인 공식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일까. 나는 아픔을 티 내는 것만으로 비난을 참아내야 할 때가 많았다.
당연히 사소한 불편함은 참고 넘긴다. 도저히 정신력이란 말로 움직일 수가 없어 얘기를 할 때도 언제나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덩치만 커가지고, 부끄럽지도 않냐.’
경멸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과 함께 들리는 핀잔에도 한 마디 할 수 없을 만큼 아파서 그 말이 더 아팠다.
요즘도 1년에 한 번은 몸 여기저기가 부으면서 열과 오한이 찾아온다.
중학생 때까지는 지금보다 이런 증상이 좀 잦았었다.
펄펄 열이 끓고 격통에 사나흘 정도 시달리지만, 어디로 보나 몸살이라 먹을 수 있는 약은 약간의 항생제와 해열제뿐이었다.
어느 날은 정말 버틸 수 없이 아파 병원을 내 발로 갈 수도 없던 날이 있었다.
약도 제대로 넘길 수 없어 끙끙대고 있었다.
그때, ‘정말 지겹게 아프기만 한다’며 아무도 없는 곳에 어른이 나를 두고 가 버린 적이 있다.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난 의자를 부여잡고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채로 앓았다.
바닥에는 침과 눈물이 너저분하게 흘러 있었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나는 그렇게 아파야만 했다.
장교 후보생 생활을 하며 첫 훈련 직전, 선배들의 집체를 가장한 과한 얼차려가 있었다.
운동장을 뛰다가 오리걸음을 하다가 하며 몇 바퀴를 돌았을까, 고관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며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관절을 움직일 수 없어 다리를 부여잡고 기다시피 하며 집체를 마쳤다.
당연히 몇 번 빠져보려고 했지만, 모욕적인 말이 머리 위로 쏟아지기만 했다.
‘다 안 아파서 하고 있는 줄 알아? 그 몸으로 그것밖에 못하면 나가 죽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차피 이 사람들에게 나는 덩치값을 못하는 낙오자로밖에 안 보일 것을 알았다.
아프다고 핀잔을 듣기 싫어 점점 병원을 자주 다니게 됐지만, 갈 때마다 의사들이 하는 말은 비슷했다.
안 아플 때까지 쉬어야 한다. 정도의 지극히 당연한 얘기였다.
그때마다 나는 의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 덩치로는 쉬는 것도 눈치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의사도 답을 내려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을 알기에 말을 삼켰다.
그냥 또 내일 아플 걸 알면서 다시 약의 힘으로 참아가며 살아가는 게 최선이었다.
자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난 이렇게 어정쩡하게 큰 몸으로 자라게 됐을까.
튼튼해 보이기만 하는 몸 말이다.
조금 더 왜소했다면, 그래도 약간의 걱정은 더 받지 않았을까.
‘그 덩치 가지고 부끄럽지도 않냐’는 소리는 듣지 않을 텐데.
다른 어정쩡함은 내 미숙함이라고 생각한다.
나란 사람의 미숙함에서 나오는 풋내 나는 모습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크면서 어정쩡하게 튼튼하지 않은 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아플 때마다 주위에서 차가운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좀 슬픈 일이다.
나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이 아닌데, 오히려 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찾아 먹는 편인데.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어정쩡함이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척도가 된다는 것이 못내 슬프다.
이제는 아프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잘 내지 않는다.
그냥 약을 먹고 하루를 다시 버틴다.
비가 오기 전 날이 되면 조금만 걸어도 다쳤던 고관절이 붓고 시큰거리지만 그냥 두들기며 참고 넘긴다.
겨울이 오는 늦가을쯤이 되면 귀 뒤쪽이 부으면서 열이 나기 시작하지만 이불속에 들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앓으며 넘긴다.
이게 모두가 원하는 덩치가 큰 사람이면 마땅히 넘겨낼 수 있는 ‘튼튼함’일까?
아니면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내야만 하는 서러운 현실일까?
크기만 한 몸뚱이를 침대에 누이고, 이불을 뺨 위까지 올린 채 뜨거운 콧바람을 맞는다.
내일도 튼튼한 척, 출근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