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인 Jan 11. 2021

72. 매일 여행하고 싶다.

여행을 가지 못한 지 1년 반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간 이후 거짓말 같이 여행을 갈 수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 ‘도래했다’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색하긴 하지만, 정말로 그런 시대가 ‘도래했다’

처음 여행을 가고 나서 못해도 1년에 한 번, 보통 반기에 한 번은 가는 여행을 벌써 1년 반째 못 가게 됐다.

어쩌면 1년 반이 아닌 더 오랜 시간 여행을 못 갈지도 모른다. 모두가 아는 그 사실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여행은 어느새인가 내 삶에 큰 위치를 차지했다. 그 어떤 삶의 이벤트보다 크게 차지하고 말았다.

‘여행은 돈만 버리는 일이지.’라고 툴툴대며 여행의 헛됨을 설파하던 나였는데, 지금은 여행을 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

하와이 밤하늘의 불꽃놀이,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의 구둣발 소리, 교토의 자글거리는 바람과 녹차. 러시아 사우나에서의 맥주 한 잔.

여행의 모든 순간순간이 감각에 박혀 재생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낯선 바람, 낯선 사람들, 낯선 말소리들. 그 사이에 섞여 있는 나는 누구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그 점이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점이라, 매일 여행을 하고 싶다.


여행을 가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완벽한 타인이 된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고, 나도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 순간 나는 완벽한 자유를 얻는다. 내 나라, 내 일상에선 얻지 못하는 자유를 얻는다.


언제나 꿈만 좇으며 산다. 동시에 삶에 치이며 산다.

꿈을 꾸기 위해선 언제나 이루어야 할 과업이 산같이 쌓이고, 삶을 살기 위해서는 파도가 치는 끝을 모르는 바다에 떨어져야 한다.

잠시 쉬어가는 주말에도 오롯이 나는 나로 있을 수 없다. 언젠가 나는 나로서 주어진 역할이 있고, 가족으로서, 교회의 청년으로서 맡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

피곤한 일이다. 오늘 이 일을 해내면 내일은 다른 일이 있다. 하나의 파도가 지나가면 다른 파도가 온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도, 살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일도 피하지 못하고 다 몸으로 맞으며 참다 보니 어느샌가 가야 할 방향을 잃고 말았다,

어떤 것이 삶을 사는 것이었고, 어떤 것이 내 인생을 사는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꿈 비슷한 게 있긴 한데 원래 형체는 알아볼 수가 ㅇ덦다.


‘왜 이렇게 살지? 왜 책을 쓰고 싶은데 책 하나 못 읽고 살지?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왜 늘 치이며 살지? 나 혼자만 있고 싶은데 왜 모두 나에게 기대지?’

피곤함은 끊이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은 달리는 나의 운동화 끈을 붙잡고 넘어트린다. 몇 번을 넘어지다 보면 억울한 나머지 넘어진 채 이런 생각만 든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


여행을 나가면 누구도 나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누구도 나에게 업무로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내가 몇 시에 일어나던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못했다고 다그칠 사람도 없다.

길거리를 가다가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도 나를 끌고 갈 시간도 없다. 나를 나무랄 현실도 없다.

여행을 간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눈 앞의 아름다움과 솔직하게 마주하게 된다.


내가 원했던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 편린들이 여행하는 곳곳,  아름다움 사이에 숨어있다.

나를 모르는, 아예 신경 쓰지도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삶의 모양 안에는 언제 잃어버렸는지 알지도 못했던 내 꿈의 조각들이 숨어있다.

나와 아름다움 여행 속 꿈의 조각만이 서로를 찾는 숨바꼭질을 한다. 그 순간 다시 돌아갈 곳도 내가 당연히 해야 할 것도 의미 없어진다.

세상을 살면서, 꿈을 좇으면서 바스러진 꿈의 조각을 다시 찾아 이어 붙이면 어느새 내가 처음 꾸던 꿈의 원형이 눈부시게 완성된다.

어정쩡한 것은 한 군데도 없다. 내가 매일 꿈꾸던 사랑스러운 세계와 어느 하나 흠잡힐 곳 없이 완벽한 타인인 나, 둘 뿐이 남게 된다.


다시 그 꿈을 고이 앞섶에 싸가지고 돌아온다. 다시 예쁜 모양을 갖춘 꿈과 함께라면 다시 세상을 살아가고 꿈을 향해 도전할 기운이 생긴다.

은각사의 아름다움 속 잠든 고요, 러시아 정교회 성당 안에 깃든 엄숙함. 끝없이 펼쳐진 도쿄역 앞 대로.

어떤 것도 괜찮다. 어떤 국가도 괜찮다. 내가 잃어버린 꿈의 조각을 그들 나름대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잠시 일을 미뤄두고 찾으러 나갈만한 가치가 있다.

여행이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것이다. 내 꿈의 가장 순수한 조각을 찾는 여로는 그 정도 대우를 받을만하고, 더욱 자주 갈 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도 여행이 가고 싶다. 어쩌면 다시는 먼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런 순간에도 다시 여행을 하고 싶다.

이왕이면 필름을 잔뜩 사서 캐리어에 욱여넣은 후 작은 필름 카메라를 같이 챙겨 다니고 싶다.

내 꿈의 한 조각을 찾는 순간을 흐릿하지만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여행하는 날을 꿈 꾼다. 다시 내가 삶 속에 부딪히며 부서진 꿈의 조각들을 찾는 다른 나라에서의 즐거운 숨바꼭질. 언제 어디서 얘기를 걸지 모르는 꿈 한 조각.

여행이 모자라다 할 만큼 필요하다. 누가 뭐래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여행을 다니고 싶다.


눈을 감으면 떠올라 행복한 꿈의 한  장을 가지고 싶다. 가장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나는 여행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행이.





매거진의 이전글 71. 풍선 같은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