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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20. 2021

81. 싸움이 싫은 과격파


나는 정치적으로도, 취향적으로도 꽤 자극적이고 과격한 편이다.
어디 가서도 정치적 성향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요즘은 아나키즘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상적인 정치 성향인 것은 알고 있다.)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보통 사람의 정신이 한계까지 몰리는 내용이 많다.    
노래를 부른다면 호흡을 끝의 끝까지 쓰거나,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노래를 좋아한다.

영화라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사랑하고, 가장 좋아했던 게임을 얘기하자면 '검은 방'시리즈를 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올곧게 극단적인 취향과 별개로 싸움은 싫어한다.

싸움을 싫어한다기보다 어렸을 적부터 투쟁심이란 게 아예 없었다.
신체 건강하고 키는 180도 넘는 남자지만, 초등학교 시절 따돌림으로 폭발했던 때 외에는 제대로 타인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화를 낸 적도 많지 않다.
     
투쟁심의 결여는 학습된 결여가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투쟁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던 것 같다.
기어 다니던 아기 시절에도 투쟁심이 없어, 아니 살아남기 위한 자기 방어본능도 없어 여기저기 큰 흉터가 남아있다.

뺨에는 갑자기 달려온 아기가 할퀴어놓은 손톱자국이 아직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다. 어머니의 말로는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얼굴을   할퀴도록 두고만 있었단다.
오른 손목에는 붉고 아른거리는 흉터가 남아있다. 뜨거운 물에 손목을 덴 흉터다. 역시 어머니의 기억으로는 내가 틀어져 있는 정수기   온수 칸에 손목을 대고 있는 채 빼지도 않고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나는 날 때부터 보통 원시적으로 가져야 할 생존본능에 의한 투쟁심과 자기 방어기제가 없는 듯했다.

아마 조금만 이전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의미로든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세상은 투쟁심 없는 나를 봐주지 않는다. 세상이 얼마나 고도화가 되었든 자연의 법칙은 하나다. 적자생존.
싸우기 싫은 나는 세상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사람을 줄 세우는 것도, 서로가 서로를 망하게 만들기 위해 간을 보는 것도 모두 신경 쓰는 것만으로 몸에 진이 다 빠진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남을 꺾고 이기는 것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약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이해하려고, 맘으로 받아들이려 해 봐도 잘 되지가 않는다. 내가 불리한 일을 겪었을 때 정당한 권리를 위해  따박따박 따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다.


사실은 조금 우습기까지 하다. 나 자신의 발전만 신경 쓰는데도 나의 시간은 모자란데 남들을 흉보고 깔아뭉개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게 우습다.

어차피 죽어 없어질 몸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죽어 없어지고 싶은지 연구라도 하는 것처럼 전쟁을 내고, 서로가 폭력을 행사하며 그게 위대한 양 으쓱대는 것이 우습다.

뭉치기만 하면 편을 나눠가지고 다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괴롭혀놓고 무슨 사회의 진보를 이룬 양 서로를 칭송하는 것이 우습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들이 하는 일은 무질서와 혼돈, 죽음만을 이끌고 오는 일인데 말이다.

조금 우스운 게 아니라 좀 많이 우습다. 이 폭력의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을수록 반대로 모든 폭력적인 사회가 우스워보인다.

세상에 대한 욕지거리와 함께 쓴웃음을 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스트레스와 조소가 꾹꾹 마음에 눌러 담겨 과격한 취향과 표현으로 터져 나온다.

세상에 대해 어떤 투쟁심도 가지지 못한 채 폭력이 만연한 자연에 던져져 나온 내 나름의 분노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파멸하는 시나리오가 좋고, 이왕이면 피범벅이지만 우스운 꼬락서니인 영화가 좋다.

모든 것을 갈아 버릴 것만 같은 메탈에 몸을 맡기는 순간은 개운함을 느낀다.

폭력적인 세상의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유롭다.


‘뭐가 그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아? 그런 것들만 좋아하고.’

주류 문화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떨어진 이런 내 과격한 취향을 들여다본 어른들은 혀를 차기도 한다.

‘그냥 어쩌다 보니 좋더라고요.’라고 말을 하면서 사람 좋은 척 웃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회에 불만이 많다.

안 많으래야 안 많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싸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오히려 내가 상처 받는 게 나은데, 더 많은 이와 싸우라고 부추기는 사회의 본능적인 모습에 불만이 많다.

그렇게 진보를 거듭했다면서 아직 승냥이 떼나 다름없는 사건사고, 커뮤니티들을 보면 사회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하지만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상하는 것뿐이다.

누구에게 나쁜 소리 하나 못하는 나는 세상을 머릿속에 넣고 불사르는 상상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있기엔 너무 날카로운 비수가 가득한 사회를 내 꿈에서만큼은 과격하게 부숴본다.

그게 잠시간의 상상이고 꿈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다시 폭력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나를 공격하고 집어삼키려는 듯한 타인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주먹 하나 못 휘두르는 과격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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