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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31. 2021

92. 침묵의 거리감.

기분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일을 며칠까지 어떻게 하겠다. 아이디어가 있는데 이렇게 계획을 세워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말은 잘하지만 기분을 말하는 건 늘 어렵다.

힘들다, 슬프다, 쉬고 싶다. 그런 부정적인 말만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기쁘다, 재밌다. 긍정적인 기분을 표현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나라고 감정을 잘 못 느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주 사소한 것에도 너무 많은 감정을 느껴 혼란스럽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의 반만 밖으로 내뱉어도 아마 나는 사회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다.

1분에도 수많은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들에 휩싸여 이미 혼란스러운데 다른 이들까지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무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대화는 감정과 감정으로 이어진다. 사실로만 이루어진 대화는 대화가 아닌 입력과 응답이라는 아주 기계적인 행위가 된다.

그리고 감정에서 말을 아끼는 나는 자연스럽게도 말이 줄어든다. 그리고 그만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거리감이 생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같이 알고 지낸 소꿉친구와 나는 몇 마디나 했을까. 대화를 다 모아도 작은 책자를 못 채울 것 같다. 소꿉친구지만 나는 그 친구를 잘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만큼만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도 나를 다른 사람이 아는 만큼 알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 적게 알지도 모른다. 2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소꿉친구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되어도 나는 그 사람을 잘 모른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상대방은 나를 모른다. 수년을 만나도 그대로다.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상대편이 그렇게 생각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피해의식이 아니다. 대화가 부족하니 친밀감이 쌓일 수 없다. 거리감이 좁혀질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친하다고 생각해도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방은 그냥 ‘아는 사람’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같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던 상관없다. 내 침묵으로 인해 상대방과 나의 내가 공유된 추억은 제로에 가까우니까.


침묵은 금이다. 별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약점을 잡히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가 당장 지금보다 유명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나는 당당할 수 있다. 흔적도 없고 나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내 침묵이 분명 나를 지켜주기도 할 것이다.

반대로 내 마음의 지지대를 걷어차는 것도 내 침묵임은 부정할 수 없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다. 구해보려고 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침묵 속 인간과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주변에 잠시 들렀던 사람들도 단순한 ‘지인’이 되어 내 곁에서 떠난다.

내 침묵은 나를 격리시킨다. 눈뜨면 코 베어간다는 사회에서 만만한 타깃이 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누구도 도움의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절벽 위 요새가 되어버린 것인지 무엇이 더 이득인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나와 친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그러니까 사회에서 ‘절친’이 아닌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열명이 안될 만큼 나는 침묵으로 인해 사회와 거리를 두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카카오톡을 열어본다. 요즘 거래처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지 어느새 친구가 800명이 넘어가고 있다.

그중에 친구가 몇 명인지, 내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은 몇인지, 그전에 같이 잠시 이야기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사람은 몇인지. 알 수가 없다.

한 번 닫은 감정의 출구를 연다고 해서 지금 친한 사람들을 얻을 수 있을 지도 확실치 않다. 이제는 새 친구를 사귀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버린 그 시간이 어쩌면 내가 놓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서 거리감을 좁히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고요해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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