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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Z Apr 27. 2024

이름의 절반을 잃은 여자

영화 <스펜서>

시소를 타는 것을 좋아하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이애나 스펜서’ 였습니다. 

소녀에게 시소를 타는 것은 참 쉬웠습니다. 

땅에 닿는 순간 다시 발을 구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하루종일 자신의 동네를 누비던 소녀는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에 들곤 했습니다.


어느덧 소녀는 운전을 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녀의 이름인 ‘다이애나’ 뒤에는 ‘스펜서’보다 ‘왕세자비’라는 호칭이 익숙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이 누비던 동네에서 길을 잃습니다. 

주변인들에게 길을 물어서야 겨우 길을 찾았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릴 때도 그랬듯 이번에도 남들보다 조금 늦은 그녀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적 시소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금 타고 있는 시소는 기울대로 기울어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을 잊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그녀는 자신의 체중을 재는 저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문득, 자신이 시소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발을 땅에 닿아보려 노력하지만, 

반대쪽에 올려진 왕관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로 보입니다. 

반대편의 왕관의 무게를 덜어내거나, 자기 자신의 무게를 더하거나. 

그녀는 이러한 방법들을 떠올리지 못한 것인지, 

자신을 버린 채로 균형을 잡는 걸 포기해 버리는 방법을 택하려 합니다. 

그 결정을 실행으로 옮기려는 순간,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다이애나 스펜서’ 라는 어린 소녀를 마주합니다. 

노란 옷을 입은 소녀는 시소를 타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 길로 왕세자비는 소녀의 아버지가 입던 옷을 입고,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당당히 저울에 오릅니다. 

114kg, 아직 부족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동안 잊고 지내던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마주한 후, 

자신이 타고 있는 시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길을 잃지 않고, 시소 타는 법을 잊지 않는 다이애나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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