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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Z Apr 17. 2024

전제의 오류

영화 <가버나움>

우리는 쉬이 정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논할 때, 나름의 전제를 두고는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인 셸리 케이건 또한 그의 저서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영생에 대해 논하기 위해 노화의 여부에 관한 전제를 설정하였고, 

심지어는 물이 100℃에서 끓는다는 과학적 사실에 대해 얘기할 때에도 

우리는 1기압의 환경을 전제합니다.


영화 ‘가버나움’을 보고 인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인간다운 삶, 생존 너머 그 무언가에 대한 추구는, 

최소한의 생존 보장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꽤나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을 만한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Chat GPT에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된다는 전제가 필요한가?’

질문의 뉘앙스 때문일지 모르지만, Chat GPT는 그러한 전제가 필요하며 더 나아가 조건이라고 답했습니다.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생존에만 집중하게 되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기 어렵고, 

인간다운 삶이 논의되기 어렵다는 것이 그 근거였습니다.


같은 질문에 영화 ‘가버나움’에 적용해 달라는 말을 덧붙여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어야만 인간다운 삶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견해는 

영화 가버나움에 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 근거로는 주인공의 사례에서 정체성과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가족과 사회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생존조건에서부터 시작해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Chat GPT는 인간다운 삶을 논의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그 권리는 최소한의 생존보다 우선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선택권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아마 ‘자인’과 ‘라힐’이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상태에서 

인간다운 삶을 끝없이 추구하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세상에 뛰어들어 

종국에는 인간다운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두고 하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이는 빈민층 내에서 취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아스프로’, ‘아사드’ 

그리고 빈민층에서도 최하위 계층으로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아이들을 학대하고, 

자신들의 아이를 집주인에게 팔아 넘기면서 아이를 낳는 것을 멈추지 않는 ‘자인의 부모’와 극명히 대비되어 더욱 빛이 납니다.


‘전제’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논증에서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명제.’ 

즉, 전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결론이 성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의 추구에 대한 저의 전제는 옳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지 않음에도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여, 

종국에는 얻어내고야 마는 인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 영위하는 것에 대한 전제를 고려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오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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