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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Z Apr 13. 2024

시간과 방

영화 <중경삼림>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방’이 있다.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방과 심리적인 공간으로서의 방이다. 

그 공간들은 예외없이 시간의 축을 따라 크고 작은 변화를 겪는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경찰 663의 방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한 상태로 드러난다. 

잊지 못한 전 연인의 흔적으로 가득한 방에서 그는 괴로워한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그의 방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변화와 함께 찾아온다. 


663의 단골 가게 직원인 페이는 663의 전 연인이 남긴 집 열쇠로 매일 아무도 모르게 663의 방에 드나든다. 

일탈과 같던 그녀의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무단침입은, 점차 과감해진다. 

페이는 663의 방을 가득 채운 전 연인의 흔적들을 지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흔적들을 남긴다. 

페이의 무단침입은 663이 자신의 방에서 피어나는 작고 사랑스러운 변화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계속된다. 


더 이상 숨고 싶지 않았던 페이가 남긴 흔적들 때문일까, 663의 무의식이 마침내 변화를 알아차린 것일까.

아니면 정말 우연일까. 

663의 육감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고, 페이의 아슬아슬한 숨바꼭질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녀가 만들어낸 작은 변화들은 마침내 663의 방을 가득 채웠고, 변한 방을 마주한 663은 그제야 페이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경찰 223의 방에는 전 연인이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들이 유통기한을 24시간도 남기지 않은 채 가득하다. 

그는 그것을 하룻밤 새 다 먹어버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게워낸다. 

마침 223의 생일 전날이었던 그 밤, 그는 홀로 찾은 바에서 새로운 여성을 만난다. 

223은 초면의 여성과 그 밤을 보내고 잠에 든 그녀를 호텔 방에 남겨두고 나온다. 


223은 쏟아지는 비를 모두 맞은 채로 조깅을 하면서 자신의 몸에 있는 수분을 모두 내보낸 기분이다. 

자신의 마음 깊이 숨겨둔 방에 가득찬 물도, 자신의 신체의 수분도 모두 내보낸 셈이다.


663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버린 방을 마주했고, 

223은 낯선 여자와의 하룻밤을 보낸 뒤 자신의 방을 정리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방들이 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들은 대개 유통기한이 존재하며, 시간을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큰 의미를 가진 것들이라면 쉽지 않겠지만, 탈이 나지 않으려면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은 과감히 버리거나 먹어보지는 않는 편이 현명해보인다. 

그것들을 비운 자리는 우리에게 딱 그만큼의 공간적 자유를 제공한다. 

그 곳을 비워두는 것도, 새롭게 그 자리를 채우는 것도 좋다. 


때때로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서서히 변해온 방을, 어느 순간에도 마주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혹은 다른 누군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방이 스스로 변할 수는 없다. 

어떠한 변화를 마주하든, 우리가 각자의 방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그 안의 무엇이든 변화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동안 알아채지 못한 변화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붙잡고서 놓지 못했던 것들을 버리거나, 필요한 것들로 채워 나를 더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내 방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내 방은 시간과 함께 어떻게 변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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