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과 비즈니스가 공존할 수 없는 이유.
아마 요새 들어 가장 자주 쓰는 단어가 "갑질"이 아닐까 싶다. 이 단어는 한국어를 넘어 [gapjil]이란 영문으로 표기되면서 위대한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이란 국가 이미지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갑질 하면 떠오르는 인물도 있고, 기업도 있을 것인데 그 기업에 Korean 이란 국호가 쓰이며 더욱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도 어느덧 마케터이자 넛크래커처럼 낀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 나 역시 90년대 생 신입들에게 갑질을 일삼는 꼰대가 아닐까 혹은 협력업체 업체 직원들이 내가 갑질 한다 생각하지 않을까 우려되면서도, 분명 직장 내 외부적으로 갑질을 당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갑질의 정의를 "우월적 지위를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에게 부당한 요청을 하는 것" 정도 내리고 글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유독 한국에만 갑질이 있을까? 우월적 지위를 활용하여 갑질을 하는 것이 과연 개인에게만 있을까? 현재는 세계 최강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은 한국 및 해외 주둔 미군의 방위비 분담금을 높여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으며, 중국과의 무역 마찰에서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중국에 대한 경제적 강공을 펼치고 있다.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둔 압박은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런 중국은 어떠한가 앞서 언급한 사드(THAAD) 배치로 인하여 중국은 한한령으로 대응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다 1910년 경술국치와 같은 일을 겪으며 우리는 매번 '을'의 입장에 서야 했으며 억울한 삶을 한(恨)이란 단어로 승화시키며 살아왔다.
우리 내부적으로는 이런 갑질의 역사가 없었을까? 춘향전만 하더라도 고을에 새로 부임한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게 하자 저항하는 모습, 콩쥐팥쥐에서 계모와 언니들이 괴롭힘 당하는 모습, 놀부 마누라가 밥주걱으로 흥부의 싸대기를 때리는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동질감을 느끼며 함께 슬퍼해 왔었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되어 변사또를 혼내주는 이몽룡, 박을 깼더니 도깨비가 놀부를 혼내주는 장면 등에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가까이는 1996년 전 국민이 열광했던 드라마 "첫사랑"의 스토리를 보면, 가난에 찌들어 살던 형제 중 형(최수종 분)이 "첫사랑" 집안의 반대로 인하여 불구가 되고, 동생(배용준 분)이 젊은 나이에 기업 사장까지 올라가서 복수를 하는 스토리,
1995년 귀가시계라 불리었던 "모래시계"에서도 가난에 찌들어 살던 태수(최민수 분)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좌절하여 주먹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농민의 자식이었으나 골프장 건설로 인해 농지를 빼앗기고 서울로 올라온 후 검사가 되는 우석(박상원 분).
2007년 홀 어머니 밑에서 키워져 대한민국 최고의 의대에 입학하고, 소위 빽을 만들어가며 최고의 외과 명의가 되었던 하얀 거탑의 장준혁 (일본 원작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니). 뿐만 아니라 "야망"이란 단어가 들어간 드라마는 십중팔구가 이런 스토리 구조를 가졌었다.
현실의 갑질 속에서 드라마 속 성공과 출세는 한줄기 희망과 같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가능했었고, 그 갑질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미래에 대해 희망으로, 내 자식 중 하나는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을 가서 갑질 하는 변사또와 같은 놈을 혼내줄 것이란 희망이 2000년대 들어오며 어느덧 좌절이 되었고, 미래는 커녕 당장 삶의 숙제를 풀어야 할 정도로 삶이 빡빡해졌다.
어느 순간 계층 간 사다리는 사라졌고, 개천에서는 용이 나지 않음을 깨달았고, 열심히 살아도 드라마틱한 미래는 내 인생에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졌다. 국민의식도 높아져 헛된 미래보다는 당장 현실의 어려움을 푸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한겨레출판), 우석훈 著, 2018』에서는 직장 내의 갑질에 대해서 보다 다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국가에는 민주주의가 도입되어 국민이 국민의 대표를 뽑고 있지만, 각 회사에는 아직도 그런 민주주의가 요원하다. 재벌가는 3세 4세에게 기업의 왕좌를 대물림하고 있으며, 오너의 자식이란 이름으로 비행기를 회항을 시키고, 법보다 위에서 직원을 괴롭히고 있다. 슬프게도 그것이 현실이다.
가까이는 직장상사에 혹은 '갑'인 업체 직원에 갑질을 당했다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필자가 사회생활을 해보며 갑질을 일삼던 사람들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겉으로는 매우 깨어있는 지식인양 행동을 한다. 본인의 자식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이고, 본인의 가족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80년대 대학을 다녔으면, 매일 병에 불을 붙이고 최루탄과 함께 했으며, 90년대 대학을 다녔으면 팔뚝질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적폐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촛불은 항상 들고 다니며, 특정 정당을 뽑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하고 수구 보수 꼴통으로 여기고 한심하게 처다 보았다. 왜냐하면 본인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랫사람 없는 대한민국 민주화를 실현시키는 깨어있는 지식인이니까.
8,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우리의 임원과 부장급들은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외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왜 저렇게 강자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독선적이고 부하 직원의 인권과 협력업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갑질을 하며, 그 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큰 사례로 우리가 받았던 교육에서 그 문제를 찾을 수 있다.(필자는 80년대에 태어났고, 90년대 생의 부하직원과 70년대 생들의 상사를 모시고 있다) 70년대는 필자보다 더 학생들의 인권이 열약했을 것이고, 군대에서도 수직적 문화가 더 강했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촌에서 농사나 짓던 사람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어 전쟁터에 내보내야 했던 일제시대의 교육방식이 있었고, 1950년대 일본과 경쟁하기 위해서 또는 북한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경제력이 부족하면 전쟁에서 밀려 죽는다는 생각으로 임했던 70년대 교육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우리가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하면서도 보편적 이데올로기(혹은 사고방식)는 황국 식민사관의 뼈대 위해 일부 지식인들의 이념이 붙여진 개념이었다. 국왕의 자리에 대신 대통령이란 직위를 만들어 넣듯, 교육, 법제, 사회 구조 모두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사상에 기반을 두었다.
태평양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회사와 학교를 비롯한 전 국가가 군대식으로 병참기지가 되었고, 그것이 맞는지 판단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일본이 남기고 간 군대식 시스템은 효율적이었으며, 생존에 최적의 사회 시스템이었다. 전 국가의 병참기지화는 그렇게 우리도 모르는 채 회사와 학교에 퍼졌고, 남자들은 아직도 군생활을 하면서 조직, 상관이라는 개념 없이는 사회의 낙오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정된 자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확실하게 성장할 곳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인적자원도 마찬가지였다 낙오자에게 시간과 비용을 낭비할 수 없었다. 오로지 경쟁을 통해서 검증된 인원에게 모든 자원을 투자하고 그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서 더 큰 부를 안겨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만 1명의 천재가 10000명의 평범한 사람을 먹여 살리니, 엘리트에 대한 대우는 반드시 필요했다.
자동차라는 기계를 빠르게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규격화다. 인적자원에게도 규격화는 필요하다. 두발자유, 복장의 자유부터 철저하게 통제하여 톱니바퀴면 규격이 동일하다면 어느 곳에나 끼울 수 있도록 사상의 통일이 반드시 필요했다.
다수의 생각은 빠른 의사결정에 저해가 될 뿐이다. 절대적으로 상명하복식의 강제성은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서 불가피했다.
시대가 바뀌었다. 산업화 시대만 해도 규격화, 효율성은 조직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하지만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단어가 퍼지던 20년 전에 규격화라는 덕목은 핵심에서 순위가 멀어졌다.
대신 "차별화"라는 가치가 기업의 생존에 필수가 되었고, 소위 "찍어 누르면 다 된다는 생각" 즉 갑질은 가장 위험한 조직문화가 되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개개인의 동기부여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헌법적 가치도 그렇고 사회적 가치도 더 이상 개인이 조직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사회적 통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개인의 월급으로 집을 사는 것과 같은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YOLO(You only live once)족과 같이 현재에 만족이 매우 중요한 가치라 믿게 되었다.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오늘의 노동의 결과를 저축하기보다는 빨리 쓰는 것이 현재와 같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현명한 선택이 된 것이다. 당연히 워라밸로 대표되는 현재의 삶에 가치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의 주 소비 계층인 20~30대를 타깃으로 한 기업이 갑질을 한다는 것은 현재 소비자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구성원들로 조직된 기업이 창의적이고 차별화된 퍼포먼스를 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직원들과의 소통이 부족한 회사라면 더더욱 창의적인 퍼포먼스는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고, 상급자가 찍어 누르는 듯한 발언에 혹은 불이익이 두려워서라도 섣불리 위험을 짊어지려 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본인의 업무 범위를 축소해 가며 진행하는 조직문화에서는 절대 조직의 곪아 터진 부분을 숨기기에 급급할 뿐이다.
마이클 포터의 Five Force 모델에서는 공급자의 교섭력, 구매자의 구섭력이란 항목이 나온다. 제품이 경쟁력이 있고 시장에서 반응이 좋으면, 갑질을 통한 밀어내기식 판매가 있을 이유가 없다. 결국 제품의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갑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갑질을 한다는 것은 매우 트렌드에 뒤쳐진다는 것이고, 노동법, 소비자 보호법, 공정거래법에 위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위와 같은 갑질은 유능한 직원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를 놓친다는 것이며, 함께해야 할 협력업체를 놓친다는 것이다.
갑질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증거의 확보가 어렵다는 점, 조직 내부적으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한 점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갑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는 점, 즉 기득권 층과 피지배계층 간의 간극이 너무 커서 기득권은 피지배계층의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생각하며, 피지배계층은 조금이라도 매뉴얼에 벗어나면 갑질이라고 반발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현재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세상사가 모두 법대로 될 수는 없다. 또한 법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개개인의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융통성 없는 사회생활은 모두에게 해가 될 뿐이다. 주 40시간 근무에 52시간 미만 근무, 최저임금제와 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법 조항 또한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법대로 하기 전에 평등한 입장에서 소통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한 필수 덕목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