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

by 농소

한국인들은 미. 소 양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여 점령하기로 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일본 정부도 몰랐고 조선총독부도 물론 몰랐다. 패망을 목전에 둔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8월 9일 이미 한반도 북쪽 지역에 들어와 청진, 원산 등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일본군들을 삽시간에 패퇴시키고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수일 내로 경성까지 진주할 것이라는 생각에 과거에 얽힌 소련과의 악연이 떠올라 충격과 두려움에 빠져 넋이 나간 상태였다.


조선총독부는 급해졌다. 8월 10일에서 15일 새벽까지 자신들의 신변보장과 안전한 귀국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우익계 송진우와 좌익계 여운형을 차례차례 접촉했다. 송진우에게는 거절당했고 여운형과는 타협을 이루어냈다. 정무총감 엔도가 제안한 내용은 치안 유지, 일본인 무사 귀국 보장이었고 여운형은 정치범, 경제범 즉시 석방, 서울의 3개월 분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건국 운동 간섭 금지, 학생. 청년 조직 훈련 간섭 금지, 노동자. 농민의 건국 사업 동원 간섭 금지 등을 요구했다. 엔도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여운형의 요구조건을 전적으로 수용했고 여운형은 해방 후 새 나라를 세우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함께 하자고 요청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국을 고대하던 송진우는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말로 단칼에 거절했다.


천황의 항복 선언 다음날 오후, 소련군이 경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으며 이 소문을 들은 한국민들은 해방군을 환영하기 위해 경성역으로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쯤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온통 태극기 물결로 뒤덮인 가운데 좌우합작 형태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 선포하였다. 이어서 즉시 전국적으로 지방 지부까지 조직하면서 모든 관공서를 접수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건국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해나갔으며 소련이 진주한 북부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이었던 여운형은 어찌하여 임시정부의 귀국을 외면하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을까? 한마디로 그를 비롯하여 박헌영, 허헌 같은 좌익계 독립항쟁가들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을 뒤엎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경성으로 온다는 소련군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내려오지 않았다. 사실 38도선으로 분할 점령하기로 약속했으니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한편 일본군 대표는 8월 20일 필리핀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했는데 그 자리에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이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조선총독부로 전문을 보냈다. 조선총독부는 정보를 접한 순간 돌변했다. 일본 헌병대와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겠다고 거리에 다시 나타났으며 건준이 장악한 신문사 등 관공서들을 다시 탈환하기 시작했고 여운형을 향해 건준을 해체하라고 경고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유일한 통치기구라고 주장했다.


총독부는 다른 한편으로 남부 지역에 진주하는 미군이 조선총독부를 해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8월 28일 아베 총독은 ‘지금 조선은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질서를 교란하고 있으므로 치안 유지 권한이 일본 측에게 있음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거짓 정보를 작성해서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냈다. 총독부의 속임수에 홀딱 넘어간 맥아더는 즉각 한술 더 뜬 답신을 보냈다. “우리 군대가 떠맡을 때까지 38도선 이남의 질서 유지 권한을 귀측에 부여한다.” 점입가경이다.


곧 미군이 진주하여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돕겠다는 내용을 담은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장군의 포고문이 9월 2일 비행기로 서울시 상공에 뿌려졌고 이어서 9월 6일에는 미군 선발대가 도착하여 조선호텔에서 조선총독부와 예비교섭을 시작했다. 바로 그날 저녁, 건준은 급히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 이름으로 좌우합작 형식으로 구성한 정부조직 명단과 함께 건국을 선포하였다. 한반도에 합법적인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미군 진주를 목전에 두고 이처럼 나라 같지 않은 나라를 졸속으로 조직하여 선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간단히 말해 정치적 주도권을 먼저 잡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맥아더는 인공에게 보란 듯이 9월 7일,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최고사령관 명의로 포고문 1호를 발표했는데 그의 포고문은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진주할 것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보아도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인데 당시 막 해방의 환희를 만끽하고 싶어 하던 한국인들로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었겠는가. 찬물을 끼얹어도 유분수지. 설상가상 포고문 내용 중에 조선총독부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근무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이는 막 해방을 얻은 한국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무슨 이유로 미군이 점령군이라고 당당하게 공포했을까? 그것은 아직 명줄이 끊어지지 않은 조선총독부의 더럽고 치사한 책략과 외교 때문이다. 맥아더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 백지상태였다. 다만 미국 본토의 안위를 위해 태평양과 일본을 교두보로 삼아야 할 상황에서 바로 인접한 한반도에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모조리 공산주의자들이요 무법자들이라는 총독부의 거짓 정보를 접했으니 맥아더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골수 반공주의자인 맥아더로서는 한반도가 온통 붉게 번져갈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을 테니 이것저것 따지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태평양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미국에 그들이 진주할 한반도 남부지역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들을 추종하는 한국민들을 다스리는 것은 더더욱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모조리 점령하고 무릎을 꿇리기 전에는 대다수 한국인들은 결코 진짜 해방을 누릴 수 없을테니까. 사정이 그러하니 초장에 휘어잡지 못하면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갈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에 미군은 점령군이 되어 한반도에 진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바로 얼마 전까지 태평양을 피로 벌겋게 물들이면서 격전을 벌인 일본이었는데 그들이 흘린 정보를 최소한의 의심도 없이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그는 지혜로운 지도자는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그의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해방의 환희를 누리려던 한국민들이 겪어야 할 마음고생과 난관은 또 어찌 치유할 것인가.


여기에 하나 더 짚어보자. 한국의 지도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지도자라면 적어도 한 치 앞을 먼저 내다보는 안목과 통찰력을 갖추어야 하지 않는가. 여기에 더해 외교독립운동한다는 명분으로 일제 식민통치 기간을 오롯이 미국에서 살았던, 맥아더의 친구 이승만은 외교가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순간에 무얼 하고 있었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다


한국민에 대해서 이미 완전히 뒤틀린 인식으로 무장된 미군 9만 2천여 명은 1945년 9월 5일 오키나와 항을 떠나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모든 환영행사를 금하라는 미군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미군부대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부두에 나온 한국인들은 일본 기마경찰들의 경계선에 가로막혀버렸다.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미군을 맞이한 것은 정치의 중심 여운형도 아니고 다른 어떤 한국인들도 아닌 항복한 일본 경찰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환영 나온 한국인 2명이 경계선을 넘어서려 하자 일본 경찰이 질서유지를 한답시고 그들을 사살해버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군중들의 격렬한 항의가 일어나 환영행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일본 경찰에 의한 한국인 인명 살상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하지는 아랑곳 않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하지는 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거나 폭도들이라고 이미 세뇌당했던 것이다.


그는 반도호텔(현 조선호텔)에 사령부 본부를 설치한 후 곧장 총독부 건물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정식으로 접수한 후 일본 장교와 일본 관리를 위한 연회를 개최하였다. 다음날인 9월 9일 오후 3시 4분, 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 미국 측에서 킨케이드 대장,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 일본 측에서 아베 총독 고츠키 요시오 17 방면군 사령관, 야마구치 기이치 진해경비 부사령관이 참석하여 항복문서 서명식을 가졌다.

항복문서 서명식을 했음에도 하지는 아베 총독을 비롯하여 총독부 관리들에게 기존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베는 9일 항복문서 서명식을 가진 후에도 총독직에 머물러 있다가 12일에야 해임되었고 일본 경찰들은 해방된 한국 땅을 여전히 자유롭게 활보했다. 그들은 미국에 패배했지 한국에게 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여전히 주제 파악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미군이 제일 먼저 배치된 곳은 부산이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인의 귀환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패전한 일본군들은 미군과 일본 경찰들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무고하게 살육을 자행한 전쟁범죄자라는 죄책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배에 오르는 그들은 희희낙락했다.


일장기가 지방 관청에서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난 10월 10일부터였다. 총독부의 공작은 성공했고 그로 말미암아 미군의 비호를 받아 안전을 누렸으며 한국인을 정권 이양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었다. 훗날 하지는 일본군은 미군의 가장 믿을만한 소식통이었으며 미군이 한국에 진주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일본이 농간을 부리고 있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미군 진주를 대대적으로 환영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여운형은 하지나 맥아더가 보내온 공문 내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금방 해방된 한국민들을 적으로 취급하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오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국민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항복해야 한다는 말인가? 40년 동안이나 점령당했던 나라와 국민을 또다시 점령하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숱한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 4년여에 걸쳐 전쟁을 벌였던 일본에 대해서 미국은 어찌 그리도 순식간에 관대해질 수 있는가?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받아들인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도대체 무슨 음모가 있었는가?


인천에 상륙한 미군들을 보니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 맞았다. 총독부와 어울려 놀아나는 꼴을 보니 토할 것 같았다. 염장을 질러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해방 시 공간에서 조선총독부가 부린 농간이 날린 결정타에 미군도 쓰러지고 해방된 한국도 치명상을 입었다.


점령군은 점령군


1945년 9월 20일 미국은 조선총독부 자리에 ‘주한미육군사령부군정청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을 설립하고 군정 사령관에 육군 중장 하지를 임명한 후 남한의 배타적 정부라고 선포했으며 ‘반공’을 미군사정부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남한의 통치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총독부 지붕 위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해방되고 독립되었음에도 태극기를 게양할 자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한반도에 친미 반소 국가가 수립되도록 체제를 구축하는 임무를 띠고 출범한 미군정에게 한국은 그들의 정치. 군사적 호구였다. 미국은 한반도를 소련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는 반공 보루로 삼겠다는 의지를 명백히 했다. 물론 태평양 전략에 따라 제국주의적 야망의 요충지인 일본을 보호하는 전초기지로서도 한국이 필요했다.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은 주춧돌이요 한반도는 기둥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 ‘민’이 아니라 한반도 ‘땅’이었다. 그것이 상수요 그 밖의 것은 상수를 채우는 변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인식은 1947년 발생한 제주 4.3 항쟁 때에도 사실임이 문서로 드러났으며 2018년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한 것이나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보면 패권 경쟁의 대상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유효하다.

지정학적 운명이란 참!


이 대목에서 끊임없이 괴롭히는 의문이 있다. 맥아더나 하지가 총독부로부터 잘못된 정보로 세뇌당했다고 하더라도 막상 남한 땅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면 그때부터라도 총독부의 정보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하지 않는가? 한국인들은 정말로 모두 공산주의자들이고 폭동을 일삼아 살아가고 있는지를 직접 경험하여 판단해야 하지 않았는가?


해방군도 점령군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장군은 8월 24일 평양까지 내려와 터를 잡은 후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 한국 역사의 첫 장일뿐이다. 한 사람의 노력과 보살핌의 결과로 꽃을 피우는 정원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행복은 오직 한국 인민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한국 인민들이여, 행복은 여러분 손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얻었고 이제 여러분들의 운명은 바로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다. 소련군은 한국 인민의 자유로운 창조 작업을 위한 모든 조건을 형성했다. 한국 인민은 스스로 자기 행복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긴 세월 속박에서 허덕이던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얼마나 감동적인 포고문인가. 더욱이 당시 사회주의자 독립항쟁가들의 독립운동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한국인들이었기에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준 감동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부지역의 한국인들은 아직까지는 소련의 음흉한 속내를 전혀 알 수 없었을 테니 자신들을 해방군이라고 선언한 소련군들에게 얼마나 감동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소련은 미국과 패권 경쟁을 시작한 마당에 한국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자기편을 만들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소련은 처음부터 노련했던 것이다. 자신들은 해방군이라고 널리 떠들어댔지만 실상은 북부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여 남부 지역의 미군에 대응하는 점령군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남한지역에 미군정이 수립되던 바로 그날 평양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에게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과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력할 것이며 적군赤軍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반일적인 민주단체와 민주정당의 결성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 활동을 원조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지령을 내렸다. 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북한에 있는 군대에게 규율을 엄격히 지키고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예의 바르게 행동하도록 지시할 것이며 종교의식과 예배를 방해하지 말고 성당 기타 종교시설에 손을 대지 말라.”


말은 번드레하게 했지만 속내는 미군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패권적 팽창 야욕!

세계 무대에 신흥 강자로 떠오른 두 나라가 세계 어디에서인들 제국주의 야망을 포기하겠는가! 탐욕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 다만 소련의 방식이 미국에 비해 유연했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이어서 소련은 10월 3일 미군정과는 다른 뉘앙스를 보이는 ‘소련민정청’을 설립하고 치스차코프 사령관으로 하여금 민정청 장관을 겸직하도록 했고 미군정과 다르게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방식을 취했다.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군정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친소 정부 수립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진주하자마자 남북을 잇는 경원선을 끊었고 남북 간 전화와 통신도 끊어버렸다. 미군정의 경제교류 대화 제의도 거절했다. 북한 지역 사람들에게는 해방군이라는 말로 안심시키고 민정이라는 간접 통치 배후에서 친소 위성 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다.


김일성은 비밀리에 귀국한 이승만이나 수모를 당하면서 귀국한 김구와는 달리 소련의 후원 아래 호위 세력을 대동하고 귀국하여 귀국 환영회까지 개최하기도 했는데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김일성은 귀국한 지 9개월 만에 소군정의 지원을 배경으로 북한 지역의 권력을 장악해버렸다.

그들은 김일성 귀국 환영 행사에 70,000명이 운집해 북적댔다고 자랑하는데 평양을 방문했을 때 현장을 가보니 하도 아담한 공간이라서 아무리 양보해서 계산해보아도 7만 명 운운은 너무 심한 뻥튀기였다.


하수 대 상수


일장기가 사라진 남쪽 상공에는 오매불망 고대하던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가 펄럭이고 북쪽에서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이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천방지축 휘날리는 모습은 낯설어도 너무나 낯선 광경이었다. 군국 일본이 좌충우돌 뿜어내던 삭풍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헤질 대로 헤진 숨을 부여잡고 살아온 한민족의 응어리진 한은 전혀 풀릴 기미가 없다. 40년 동안 꽁꽁 얼어붙은 식민의 땅은 해방의 환희가 가차 없이 뚫고 솟아나려 하는 새싹처럼 힘찬 용트림을 내뱉기도 전에 또 다른 군홧발들에게 여지없이 짓뭉개지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은 무슨 목적으로 한반도에 똬리를 틀었을까? 그것은 상대를 제압하려는 전초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강자들의 수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반도에서 노리고 있는 두 강자의 야망은 똑같았지만 그 야망을 이루려는 전략 전술에 있어서는 소련이 한 수 위였다. 미군정은 반공을 키워드로 내세워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정책과 방법을 실행한데 반해 소군정은 독립국가 건설을 내세워 인민자치제도를 운영하였다. 소련군은 자신들은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임을 강하게 확인시켜주었던데 반해 미군은 자신들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했다고 노골적으로 포고하였다. 소련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의 후원 협력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데 반해 미국은 맥아더의 입을 빌려 자치 정부 수립은커녕 점령군에 저항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경고했다.


맥아더나 하지는 처음부터 한치의 여백도 없이 남한을 밀어붙인데 반해 소련은 허허실실 전술로 접근했다. 더욱이 각자 군정을 시작하면서 시행한 조치들에서 완전히 차별되었다.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주한 후 제일 먼저 실시한 조치는 감옥 을 열어 모두 석방시키고 대신 텅 빈 감방들을 반민족친일행위자들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친일파들을 철저하게 숙청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군정은 친일파들을 숙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찰, 군대 등 각 분야에서 그들을 등용했다. 해방의 기쁨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방식이 더 호소력이 있었을까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미국은 서툴렀고 소련은 노련했다. 소련은 상수였고 미국은 하수였다.

그러나 혼돈의 해방 공간에서 미국과 소련이 실행하는 전술적 방법은 달랐을지라도 자기들만의 이익을 챙기려 드는 전략적 목표는 같았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 패잔병 처리만 마무리한 후 한반도를 떠났더라면 그들은 대대로 환영받고 칭송받을 해방군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점령군이라고 커밍아웃한 미군이나 처음에는 해방군이라고 가면을 쓰고 들어온 소련군이나 모두 틀림없는 점령군이었다.


미군과 소련군은 어찌하여 해방된 나라, 자유를 얻은 국민을 향해 점령군 완장을 차고 행진했는가? 40년 응어리진 한을 뿌리 뽑는 것으로도 모자랄 판에 무엇 때문에 해방의 환희로 벅찬 한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가?


일본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징벌에서 비껴갔는가? 전범 국가 일본은 어찌하여 또 다른 전범 국가 독일처럼 조각내지 않았는가? 형언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일본 군대의 최정점에서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진 천황은 어찌하여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버젓한가? 미국과 소련은 왜 전범 일본이 아니라 그 전범 국가에게 긴긴 세월 동안 치욕을 당해 온 한반도를 두 동강 내면서까지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기 시작하는가?

해방은 백일몽이었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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