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웃 캐스트, 문둥병자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겪으며 하루하루 생을 이어간다. 설상가상 그들의 종교는 보살핌을 주는 대신 그를 사회로부터 쫓아내 버렸다. 동네 너머 산 너머 문둥병자들이 우굴거리는 동굴로 쫓겨간 아웃캐스트. 그에게는 가진 것은 도무지 없는, 모두 잃은 것들 뿐이다. 건강도, 가정도, 직업도, 사회생활도. 살아갈 의욕도, 살만한 가능성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그때 예수의 소문이 들려온다. ‘길이요 생명!’. 정신이 퍼뜩 든다. 예수라면 자기 병을 고쳐줄 것 같다. ‘길’을 만나러 길을 떠나야겠다. 동료 문둥병자들은 한사코 말린다. 운명이려니 여기고 여기 동굴에서 그냥 사는 데까지 살잔다. 동굴을 나서는 순간 세상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것이란다.
아니다. 이판사판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은 목숨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 모른다. 먼저 생을 마감한 동료들이 걸쳤던 누더기들을 주워 모아 썩고 문드러져 너덜거린 손과 발을 칭칭 감고 입도 가리고 코도 가리고 눈만 빠끔히 내놓은 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 낮에는 으슥한 곳에 몸을 숨겼다가 밤에만 걷는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몇 날 밤을 걸어서 마침내 예수가 머무르고 있는 동네까지 왔다.
예수를 보자마자 간청한다. ‘고쳐달라고, 살려달라고.’ 그의 행색을 본 예수는 주저 없이 그를 만지면서 단 한마디 말. ‘깨끗함을 받으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무런 감각이 없던 양볼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썩고 문드러진 살갗들 여기저기에 지독한 통증이 되살아난다. 드디어 살았다. 목숨 걸고 길을 떠난 보람이 있구나. 하늘이 쪼개지는 통증의 고통이지만 마음은 벌써 높이높이 날아오른다. 오랫동안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 술 한잔 나누면서 회포를 풀 수 있겠구나. 마침내 새 세상이다.
* 나병 환자 시인 한하운.
자고 나면 눈썹이 사라지고, 자꾸 코가 막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어제는 발가락이 하나 떨어져 나가더니 오늘은 또 다른 발가락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밤에는 쓰레기통 옆에서 자고 낮에는 깡통을 든 채 빌어먹는 생활. 어쩌다 차를 타면 발길질을 당하고 강제로 끌어내려진다.
죽음이 그리운 지독한 삶이지만, 삶에 대한 애착을 노래로 승화시키는 시작詩作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리.”
* 우리들 세상.
차고 넘치는 재산과 권력에 파묻혀 희희낙락하는 이들.
성 욕망을 강제하는 무뢰배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외쳐대지만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기에 정신 팔린
정치꾼들.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어버리는 그들만의 정의를 외치는,
어이없는 판결로 한恨으로 몸부림치는 이들을 쏟아내는,
불한당 같은 법 종사자들.
그들만의 세상을 누리겠다고 빗장을 닫는다.
빗장 넘어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의 아웃캐스트들.
하루 벌이로는 기초생활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생존 위기에서 몸부림치는 이들,
억울함으로 응어리진 가슴을 쥐어뜯으며 살아가는 이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피부 색깔이 달라 함께 못살고,
성性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이들의
통곡 소리이다.
누가 그들의 손을 잡아줄까.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을까.
가정으로.
직장으로.
사회 속으로.
양의 동서에서 동시대에 살았던 피타고라스와 부처는 한 목소리로 설파한다. ‘삶은 기만, 욕망, 폭력, 죽음, 불타는 쓰레기로 이루어진 불의 소용돌이’라고.
시시포스는 다시 굴러 내릴 것을 알면서도 오늘도 집채만 한 바위를 산 꼭대기로 올려놓는 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바위를 밀어 올리니 굴러 떨어지고 다시 밀어 올리니 다시 굴러 떨어지는 끝 모르는 고된 일상을 멈추지 않는 시시포스를 물끄러미 바라본 알베르 카뮈는 결론한다.
“사람의 삶에 대한 애착에는 세상의 모든 비참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다.”
맞다.
하여
인생은 죽기 살기로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