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철학을 다루는 한 유튜브 채널을 매우 흥미롭게 보고 있다. 특히나 융의 분석심리학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그동안 이리저리 굴리며 나름의 결론을 내렸던 질문들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에 흥미를 느꼈고, 전부터 미뤄왔던 이 책을 읽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부제가 마음에 든다.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도구들.
정말 그러했다. 더 빨리 읽을 걸 후회할 정도로 술술 재밌게 읽은 책.
01
철학의 역사는 '제안 → 비판 → 재제안'이라는 흐름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철학자가 문제를 마주한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답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 답에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지면 이것이 한동안 정론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현실이 변하면서 정론이었던 해답에 흠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새로운 철학자가 '그 답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가?'라고 비판하며 다른 답을 제안한다.
철학은 늘 불완전한 학문이었고 그러므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어떤 철학자의 특정 이론보다도 철학이라는 학문이 이어져온 '제안 → 비판 → 재제안' 이라는 방식 자체가 큰 배움이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세상도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제대로 마주하고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이거인가? 저거인가?' 정했다면 행동하고, 또 다시 생각하고.
02
그것은 진짜 당신의 욕구인가
르상티망 ;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개인은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 기준에 예속, 복종한다 > 명품이나 고급차를 무리해서 구입한다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판단을 뒤바꾼다 > 명품이나 고급차는 사실 다 별로라며 부정한다
어느 것도 '나답게 사는 것'에 방해된다. 르상티망은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판단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좌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나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타인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르상티망인지 판별해야 한다.
김경일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이것이 진짜 나의 욕구인지, 타인이나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욕구인지 알고 싶다면 일단 그것이 없이도 멀쩡하게, 오히려 행복하게 사는 사람과 지내볼 것.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그 욕구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면 가짜. 그것을 멀리했을 때 계속해서 생각이 난다면 진짜.
무엇보다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욕구가 정말 나의 심연에서 올라온 욕구인지. 정말로 지금 집중해야 할 우선순위가 높은 욕구인지.
03
나의 세계 인식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 시스템에 의해 다르게 규정된다. 풍부한 어록은 세계를 깊고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역량으로 직결된다.
시니피앙 ; 어떤 개념을 표현하는 언어
시니피에 ; 언어에 의해 표시되는 개념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긍정하는지보다 무엇을 부정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일본의 한 트위터에서 이야기되었던 '공부란 세상을 보는 시각의 해상도를 높여주는 방법이다' 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공감하는 대목이었다.
첫 번째, 일본어를 10년 넘게 사용하며 느끼는 변화다.
스미마셍과 아리가또로 대변되는 일본의 문화가 스며든 것인지 별 것 아닌 것에도 꾸벅 인사를 하고 사과를 잘하게 되었다. 바뀐 말 습관으로 인해 전에는 그냥 넘겼을 상황이 이제는 감사하거나 미안한 상황이 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참 희한한 것은 일본어로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지만 한국어로는 말하기 힘든 말들이 있다. 그 말에 대한 문화의 차이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모국어가 감정적으로 마음의 울림이 더 큰 것이 이유인 듯도 하다.
두 번째, 새로운 업계나 회사로 이직과 같은 큰 변화가 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용어를 외우는 일'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지식이든. 첫걸음은 무조건 용어를 이해하는 일이다. 상대가 쓰는 언어로, 상대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친밀도와 설득력이 단번에 올라가는 효과도 있다. (이 사람은 말이 좀 통하는 구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말을 이해하면 상대가 어떤 관점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좀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영업의 일 중 반은 잘 듣고, 들은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었다.
요즘 러닝을 뛰며 많은 풀과 새를 본다. 문득 궁금해질 때면 스마트 렌즈로 이름을 알아본다. 그러면 몰랐던 핑크색 토끼풀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고, 가끔씩 낚시터에 날아와 한참을 서 있던 새가 왜가리였다는 걸 안다. 나한테 세상 사는 재미란 그냥 그런 게 아닌가 싶다.
04
앞으로의 인생 전략 '잘 도망칠 것'
페르소나
*사일로 ; 기업 내 어떤 부문이나 부서가 외부와 정보를 공유하거나 연계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고립된 상태. 여기서는 페르소나를 뜻함.
사일로는 자신이 만들고자 해서 만드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어느 사이엔가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반드시 모든 사일로를 충분히 납득하고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일로들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룸으로써 사람이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일로를 횡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 횡적 연계를 가속화하는 것이 '휴대전화'이다. 가상의 횡적 연계가 24시간 이어져 어디를 가도 심리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회사원으로서의 페르소나와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페르소나가 늘 따라다닌다. 여러 개의 사일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할 인류가 고대에서부터 지속해 온 생존 전략 자체의 기능을 잃게 되는데 이는 훨씬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이대로 계속 흘러간다면 다다르게 될 결론은 단순하다.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는 사일로를 균형 있게 유지하던 전략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일로가 하나하나 쇠퇴해간다. 따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일로나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사일로로부터 차츰 도망치게 된다. '도망친다'는 키워드는 앞으로의 인생 전략을 새로 구상하는데 중요한 키워드다.
파라노이아(아이덴티티의 편집증)와 스키조프레니아(아이덴티티의 분열증)
파라노이아 ; 정주定住하는 사람
일관성 있고 알기 쉬운 定住의 인격과 인생.
ex) ㅇㅇ대학교, ㅇㅇ대기업 근무, ㅇㅇ동네에 사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집착. 기회나 변화를 받아들일지는 축적해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에 부합하는가로 판단. 도중에 그만두면 지는 것이다. 사태가 급변하면 매우 약해지며 자칫 성체에 틀어박혀 전력질주를 하다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
스키조프레니아 ; 도망치는 사람
고정적 아이덴티티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판단, 행동, 발언. 우발적 기회나 변화는 그때그때의 직감에 따라 받아들임.
'딱히 명확한 행선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위험하다 싶으면 일단 움직인다' 그러려면 몸이 가벼워야 하고 중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에 몸을 둔다. 안정된 영토는 구축하지 못해도 사태의 변화를 직감하는 센스와 우연에 대한 직감에 의지하여 살 수 있다.
즉, 변화가 빠르고 예측할 수 없는 지금 시대에는 스키조프레니아가 더 적응하기 수월하다는 것.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먼저,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가상의 횡적 연계에 대한 이야기.
일본은 회사용 휴대폰이 따로 지급되기 때문에 개인 연락처를 회사 동료와 공유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책에서 말한 회사원 페르소나와 개인으로서의 페르소나가 부딪치는 스트레스는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일이 많아서 24시간 회사원 페르소나에 묶여 있었달까....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내가 느낀 연결의 피곤함은 SNS였다. 생각 없이 손가락 한번 까딱한 것뿐인데 타인의 세계를 보는 사이에 진이 빠졌다. 인스타를 보다가 무심코 클릭해서 옷이나 인테리어를 한참 구경한다든가. 남이 맛난 거 먹고, 남이 여행한 거 보면서 대리 만족하는 사이에 정작 내가 먹고, 여행 가는 건 줄어든다든가. SNS를 보면 볼수록 '진짜 나'에 집중하는 시간은 줄고 '타인이나 사회가 권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듯 했다.
그래서 작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어플을 지웠다. 여전히 PC를 켜면 유튜브 세상을 헤매지만 SNS에 쓰는 시간은 현저히 줄었고 앞으로도 SNS어플들을 다시 깔 생각은 없다. 이것 또한 하나의 '도망'같은 것인가?
그리고,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
따져보자면 나는 전형적인 파라노이아였다. 부심이나 격을 따지진 않지만 '내 행적의 일관성'을 예민하게 따졌다. 취업할 때 설명하기 곤란한 것도 있고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면 설사 내가 좋아하는 것이어도 중간에 그만둬버리곤 했다.
그런데 최근 조금씩 성향이 변하는 중이다. 하고 싶으면 그냥 하고, 아닌 것 같으면 빨리 발을 뺀다. 하지만 이런 단호한 선택이 가능해진 건 그동안 파라노이아로 살아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다양성을 누르는 답답함, 변화에 대한 망설임. 이 막막한 감정들을 너무나도 깨고 싶었다. 지금 깨야만 남은 인생을 좀 더 유연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느꼈다. 몇 년 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많은 것들을 시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깨 보면 안다. 일관된 심플함도 좋지만 여러 가지를 뒤섞는 것도 그 나름의 쾌감이 있다는 걸.
또한 파라노이아로 살아온 시간은 스키조프레니아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직감'이라는 것을 갈고닦는 시간이었다. 경험과 시행착오가 없는 사람에게 '직감'이란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평생을 저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갈 것 같다. 기본은 파라노이아이지만 스키조프레니아가 지닌 유연함을 늘려가며.
05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유에 대하여
우리의 행동과 선택은 자유이며, 따라서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하지 않을까'라는 의사결정에 스스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시간, 즉 인생 자체를 사용해 어떤 계획을 실현하는데 이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어떤 우발적인 사건까지 모두 계획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전쟁. 외부로부터 닥쳐온 사건이 아니다. 내가 전쟁을 거부하려면 반대운동을 할 수도 있고 병역을 거부할 수도 있고 자살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그 사건을 받아들였다면 그건 자신의 선택이다.
자유가 들이미는 고독과 책임을 마주하며, 자신다운 삶을 살기 위해 정신력과 지식, 자아를 갈고닦을 것인가.
무리가 들이미는 구속과 규제를 마주하며,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안정을 누리며 살 것인가.
정말 무섭게도 삶의 어느 순간에 반드시 인생은 말한다.
답을 내렸든 못 내렸든 내 알바 아니고, 선택해.
06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불확실함에 대하여
탈레브의 반취약성 '외부의 압력이나 혼란에 오히려 성과가 상승하는 성질. 충격을 원동력으로 삼는 성질'
(운동으로 근육에 상처가 나고 회복시키면서 근육이 붙는 것과 비슷)
'시스템에 해를 끼치는 현상의 발생을 예측하기보다 시스템이 취약한 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훨씬 쉽다. '
ex) 전문기술을 갖춘 건축 사무소의 목수 vs 대형 종합 건설회사의 사무직 , 무엇이 될 것인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자동차 vs 자전거 , 무엇을 탈 것인가?
큰 조직에서 근무하며 그 안에서 줄곧 지내다 보면 자신의 기술이나 지식 같은 인적 자본과 인맥, 평판, 신용 등의 사회자본이 대부분 기업 내에 축적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적자본과 사회 자본은 그 조직 사회를 떠나게 되면 그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젊을 때 많은 실패를 맛보는 것, 여러 조직과 커뮤니티를 경험하며 인적 자본과 사회 자본을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 형성하는 것.
나의 커리어, 내가 속한 조직에 '반취약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주식, 코인, 유튜브, 부업에 열광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많은 해를 입고 있고, 서둘러 반취약성을 적용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 또한 불안했고 직업이나 삶을 꾸리는 방식, 시간을 쓰는 방법에 변화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