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봉인을 깨뜨린 가주(프롤로그)

황궁의 심장을 지키겠습니다

by 강롸롸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밭 위에 달빛이 내리고,

은빛에 젖은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세레나는 긴 망토 자락을 여며진 채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시간에, 여기에 누가 있지?”


그녀의 시선 끝, 밭 중앙에 앉아 마력초를 손끝으로 비비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모습은 느긋했고, 마치 자기 땅을 어슬렁거리는 주인 같았다.


세레나는 허리에 찬 단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거기, 누구지? 허락 없이 들어온 건 목숨으로 갚아야 할 수도 있어.”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들며 미소 지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장난기 어린 눈동자가 반짝였다.


“눈빛은 위협적이군. 그런데 그 말은 이상하게 위협적이진 않은데?”


세레나는 단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빈말로 넘길 생각하지 마. 정체를 밝혀.”


남자는 마치 흥미롭다는 듯 잎사귀를 흔들며 답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방랑자일 뿐이야.

그런데 이 풀…… 미력초지? 황무지에서 이런 걸 키우다니,

보통 일은 아니지. 드레스 자락이나 걱정할 아가씨들이랑은 다르네.”


세레나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능글맞게 웃고 있었지만,

웃음 속 눈빛만큼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 속에선 오래된 그림자 같은 것이 번뜩였다.


“네 눈.” 세레나가 낮게 말했다.

“늘 불길을 본 자의 눈빛이야.”


남자는 잠시 웃음을 멈추더니, 이내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불길은 안에서 번지는 법이지. 넌 아직 그걸 모르나 봐.”


그 순간, 멀리서 갑작스레 불길이 치솟았다.

창고 쪽에서 솟아오른 화염은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번졌다.


세레나의 얼굴이 굳었다.

“마력초에 불이 붙으면 폭발한다! 지금 이대로면—”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망토를 벗어던지며 불길 쪽으로 뛰어들었다.


“미쳤군!” 세레나가 외쳤다.
그는 웃으며 외쳤다.

“불길은 차단할 수 있어. 네 마력초인지 마력풀인지는 지켜주지!”


불길 사이에서 남자는 칼을 뽑아 땅 위에 긋기 시작했다.

검날 끝에서 희미하게 빛이 번지며 마법진처럼 이어졌다.

순간 불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대피할 틈이 생겼다.


세레나는 망설임 없이 사람들을 불러 진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불현듯 스쳐가는 의문이 자리 잡았다.


“저 남자, 도대체 누구지? 왜 이렇게 상황을 잘 아는 거야?”

불길이 어느 정도 잦아든 뒤, 세레나는 땅에 떨어진 단검 하나를 발견했다.

손잡이에는 제국 귀족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단순한 도둑 짓이 아니야.” 그녀가 속삭였다.

옆에서 불을 막아내던 남자가 단검을 보더니 서늘하게 웃었다.


“내부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이런 짓은 불가능하지.”

세레나는 단검을 움켜쥔 채 남자를 노려보았다.


“넌 대체 뭐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남자는 태연히 손을 들어 보였다.


“의심이 많네. 그저 지나가는 방랑자라 했잖아.

다만…… 나는 네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보아왔을 뿐.”


세레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그러나 동시에, 불길 속에서 목숨을 걸고 마력초를 지켜낸 사람이다.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남자가 한 발 다가섰다.
“좋아, 정체를 알려줄 순 없지. 하지만 대신 제안하지.

내가 네 곁에 서겠다. 네 밭을, 네 목숨을 지켜주지. 대신 넌 날 믿어야 해.”


“믿어?” 세레나는 냉소했다.
“내가 왜 네 말을 믿어야 하지?”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도 눈빛은 서늘했다.
“왜냐하면, 방금 네가 본 것처럼…… 내가 없었다면 이 밭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을 테니까.”


세레나는 단검을 내렸다. 그러나 차갑게 경고했다.
“좋아. 하지만 조건이 있다. 내 허락 없이 어떤 결정도 하지 마. 내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 그 순간 네 목숨은 내가 거둔다."


남자는 크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네 조건을 받아들이지. 지금부턴 네가 나의 주인이야.”


그의 손이 세레나의 손을 감싸는 순간, 달빛 아래에서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웃음은 여전히 능글맞았지만, 그 속에는 차갑고 고독한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세레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남자…… 웃음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어. 깊고, 서늘한 상처.”

그러나 지금은 묻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이미 또렷한 결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생은 반드시, 가주의 자리로.
그리고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불길을, 내가 직접 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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