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임계점
강의는 늘 준비된 무대처럼 보이곤 한다. 단정한 슬라이드, 매끄러운 진행, 적절한 농담과 질문 유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무도 모르는 긴장감과 돌발, 실패의 그림자가 있다. 강사는 순간의 위기를 버텨내는 훈련과 같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중견기업 임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ESG 보고서 작성 실무 강의. 사전 미팅을 통해서 실무 중심으로 알맹이 있는 내용을 원한다는 요청을 받았다. 평소보다 더 깊이 있는 데이터 사례와 실제 보고서 양식을 준비했고 슬라이드는 100장이 넘고 발표 연습도 두 차례나 더 했다.
그런데 막상 강의장에 도착해보니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얼굴들. 뭐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눈빛. 슬쩍 건넨 인사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차가웠다. 심지어 한 임원은 10분 만에 나가버렸고, 뒷자리에서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보던 참가자들이 속속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흔들렸다.
“혹시 너무 이론적인가?”
“혹시 말투가 딱딱했나?”
그 순간부터 갑자기 PPT 글자들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말은 점점 끊기고 부자연스러워졌다. 나는 내 속도와 감을 잃어갔다. 무대 위에서 홀로 길잃은 배우처럼
그 강의는 나의 실패 사례로 오래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강사로서 처음으로 깊은 회의를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그냥 나 혼자 잘 말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일까?”
“진짜 필요한 것은 전달이 아니라 연결이 아니었을까?”
며칠간 고민을 반복한 끝에, 나는 내 강의안을 전면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강의가 아닌 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슬라이드 수를 절반 정도 줄이고, 질문과 참여형 코너를 넣었다. 정답을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현장에서 당신이 가능할지를 묻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음 강의에서 나는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오늘 이 시간은 제가 지식을 전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일들을 ESG라는 언어로 다시 설명해 보는 시간입니다.”
놀랍게도 그 말 한마디에 강의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누군가는 고개를 들었고, 누군가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오늘 강의 참 편안했어요. 나도 ESG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알았다. 강사는 실수할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심은 회복된다. 내가 다시 단단해질 수 있었던 건 실패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을 몇 번씩 겪어 본 나는 항상 백업 자료를 2개 이상 준비하고, 오프라인일 때는 유머 한 마디를 가슴에 품고 들어간다. 강사로서 겪는 위기와 고난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는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들의 시간을 책임질 만큼 마음을 다했는가?”
그 질문에 솔직히 대답할 수 있다면, 실패도 성장의 한 조각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그 조각들이 강사의 얼굴과 명함이 되어줄 것이다. 조금 더 유연하고,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따뜻한 얼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