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봉인을 깨뜨린 가주(8화)

황궁의 심장을 지키겠습니다

by 강롸롸

로엔 가문의 의회홀은 새벽의 냉기를 머금고 고요했다.

높은 천창을 타고 들어온 빛이 긴 테이블을 가늘게 훑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오늘을 위해 꺼내 놓은 가문 인장과 서약문이 놓여 있었다.


인장은 손바닥만 한 타원형 금속이었다.

바탕은 은빛 강철, 둘레에 아주 미세한 홈이 돌아가고, 정면에는 검은 매가 날개를 펼친 문양이 음각으로 깊게 새겨져 있다.

가까이서 보면 홈 사이에 가느다란 유리 실선이 박혀 있어, 무엇인가를 전도할 수 있는 장치처럼 보였다.


세레나는 인장 옆에 선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끝은 차가웠다.


집사 마르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오 종이 울리면 바로 서약을 시작하겠습니다. 의식 순서는 미리 전달한 그대로입니다.”
“알겠어.” 세레나는 고개로 답했다.


의회홀 가장자리에는 관리들과 호위병이 정렬해 있었다.

누구도 크게 말을 섞지 않았다.

오늘이 끝나면, 가문은 새 주인을 갖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공기의 밀도가 달라져 있었다.


종이 울렸다.

세레나는 테이블의 서약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약문 아래의 나무 표면은 평범해 보였지만, 사실 이 테이블은 초대 가주가 만든 장치였다.

표면에 각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인장이 접촉하기 전까지 어떤 문양도 드러나지 않는다.


“로엔의 이름으로, 오늘부터 가문을 맡겠습니다.”
세레나는 의식의 문구만 간결히 읊고, 곧장 인장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의회홀의 문이 안쪽에서 쾅하고 부딪히며 열렸다.

무장한 사내 몇이 밀려 들어왔다.


“멈춰!”

누군가가 소리쳤다.

칼끝이 번들거렸다.


“가주 자리는 피가 정한다!”
몇몇 관리가 비명을 삼키고 뒤로 물러났다.

호위병들이 검을 뽑아 반원을 그렸다.


세레나는 뒷걸음치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블 쪽으로 한 걸음 더 붙었다.
가장 앞선 사내가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음이 부딪혔다.


“비켜.”
루시안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칼을 받아냈다.

두 번의 교차. 한 명이 쓰러졌다.

그러나 다른 칼끝이 루시안의 어깨를 스치며 붉은 선을 그었다.


피가 떨어졌다.

바닥에 작게 찍힌 자국이 금방 번졌다.

세레나는 시간을 더 끌지 않았다.

인장을 오른손에 고쳐 쥐고, 서약문 위 정해진 자리에 수직으로 꾹— 찍었다.


바로 그 순간, 인장 둘레의 미세 홈에서 은빛 줄기가 스며 나와 테이블 표면으로 번졌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나뭇결 사이로 가느다란 빛의 선이 길을 찾듯 흘렀다.

선은 서로를 찾아 빠르게 연결되더니, 테이블 전면에 숨겨진 고대 룬과 매 형상을 완성했다.

마치 빈 회로에 전류가 흐르듯, 빛의 회로가 한 번에 살아났다.


의회홀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그 빛을 보았다.

완성된 문양의 중심에서 은빛이 부드럽게 상승했다.

기둥 같은 빛줄기가 허공으로 올라와 한 번 숨 쉬듯 흔들리고, 천창의 빛과 겹치며 홀 전체를 환하게 퍼뜨렸다.


이건 ‘가주 인정’의 신호였다.

누가 시도해도 정식 인장과 정해진 자리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 그 두 조건이 정확히 일치했다.


“붙잡아!”

침입자 중 하나가 다시 덤벼들려던 찰나, 빛이 테이블 가장자리까지 번져 그들의 발등을 가로질렀다.

인정 의식이 진행 중일 때는 장치가 미세한 억지력을 뿜어 주변을 밀어낸다.

사내들이 반발하듯 비틀거리며 주춤했다.


“지금이다!”
복도 쪽에서 강철 장화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금군의 사리온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진입했다.


“무기를 버려라! 이 의회홀은 제국법이 보장하는 가문의 보호 구역이다!”
병사들이 양쪽에서 파고들며 침입자들을 제압했다.

짧은 충돌 끝에 칼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전투가 멎자, 테이블 위 빛의 회로는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매의 날개를 닮은 선들이 잔물결처럼 흔들렸다가 고요를 되찾았다.


세레나는 인장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인장 테두리의 홈이 선명하게 눌려 있었다.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자, 시선들이 일제히 피했다.

경외, 안도, 그리고 계산이 섞인 눈빛들.

필요한 만큼만 확인한 셈이다.

오늘부로 가주는 세레나로 정해졌다.


그때, 붉은 방울 하나가 테이블 끝에 떨어졌다.

루시안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였다.

방울은 막 닫히려던 은빛 회로의 끝선을 톡 하고 적셨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끝선의 은빛이 잠깐 진홍으로 물더니, 맥박처럼 한 번 쿵— 하고 되돌아왔다.

물든 빛이 선을 따라 역류하듯 빠르게 이동해, 매 문양의 심장 자리에서 은빛과 붉은빛이 겹쳐 둥글게 맺혔다. 두 빛은 섞이지 않고, 맞닿은 채로 미세하게 고동을 보였다.

살아 있는 심장 소리를 흉내 낸 듯한 박동이었다.


세레나는 본능적으로 테이블을 스쳤다.

“멈춰.”
그녀의 손끝이 매 문양의 중심을 가볍게 누르자, 홈 사이로 퍼지던 붉은빛이 맥을 고르고, 은빛에 안정적으로 포개지며 가라앉았다.

잔광만 남긴 채 회로는 천천히 닫혔다.


사리온이 가까이 와서 확인하고는, 낮게 말했다.
“의식 장치가… 피에 반응한 것처럼 보였소.”
“반응은 잠깐이었고, 지금은 안정됐습니다.”

세레나가 명확히 답했다.

“서약은 유효합니다.”

루시안은 어깨를 잡힌 채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깊진 않지만 움직일수록 피가 번진다.


세레나는 마르셀을 향해 손짓했다.

“응급상자.”


마르셀이 곧장 거즈와 약을 가져와 상처를 눌렀다.

피가 흔들리며 묻어 나왔다.


루시안이 눈길을 내렸다가, 테이블의 잔광을 한 번 더 보았다.
“가문 장치가 깔끔하군.”
“불필요한 장식은 없다.”

세레나가 짧게 받았다.

“필요한 것만 남기는 법이지.”


둘 사이로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리온이 침입자들을 끌어내며 보고했다.


“내부 협력자를 추궁하겠습니다. 의회홀 출입 기록과 보급 라인, 오늘 안으로 정리해 올리지요.”
“로엔의 이름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세레나는 분명히 말했다.


“서약이 끝났으니, 가주의 권한으로 문서와 창고를 전부 재점검합니다. 붉은 인장으로 통과한 지시문도 예외 없이 확인하세요.”


“알겠소.”

사리온은 짧게 경례하고 물러났다.

홀에 남은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쓰러진 의자들은 제자리로, 흩어진 칼은 수거되어 자루에 담겼다.

빛의 회로는 가장 마지막 가느다란 선까지 사그라들어, 처음처럼 평범한 나뭇결만 남았다.

각인은 인장이 닿을 때만 드러난다.

그 외에는 누구도 이 테이블의 속을 볼 수 없다.


세레나는 인장을 케이스에 넣고 잠금쇠를 닫았다.

덜컥— 명확한 소리가 홀 안에 짧게 울렸다.


마르셀이 루시안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며 물었다.

“치료실로 모실까요?”
“그게 좋겠군요.”

세레나가 곁눈질로 상처를 확인했다.

“움직임을 줄여.”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기 전, 그는 테이블의 가장자리(피가 닿았던 끝선)을 한 번 더 보았다.

이미 흔적은 없다.

그럼에도 잠깐 있었던 맥동의 느낌만은, 눈으로 본 것 이상으로 선명하게 남았다.


세레나는 의회홀의 문가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 테이블을 확인한다.

나뭇결은 조용했고, 천창의 빛만 제 할 일을 했다.

서약은 완료되었고, 장치는 닫혔다.

오늘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누구에게 물어도 답은 같다.


“마르셀.”
“예, 가주님.”
“오늘 들어온 문서와 창고 장부를 전부 올려. 붉은 인장으로 통과한 건 빼놓지 말고 표시하고.”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세레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의회홀의 공명음이 짧게 반사되고 사라졌다.

복도는 바빴지만 질서 있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동선이 군더더기 없이 정리돼 있었다.

가문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밖으로 나오며 그녀는 인장 케이스를 다시 한번 눌러 확인했다.

잠금쇠는 확실했다.

손가락 끝에 눌린 테두리 자국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이면 충분했다. 오

늘 필요한 만큼의 증명은 마쳤다.

이제 해야 할 일들이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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