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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May 06. 2019

3·1운동은 어떻게 거대한 물결이 되었나

1919년 봄,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만세시위는 4월 중순 일본군과 경찰이 증원 배치되면서 기세가 꺾였다. 일제는 더욱 강력한 폭압적 진압을 동원한 후에야 겨우 조선인들의 만세시위를 억누를 수 있었다. 


만세시위는 5월과 6월에도 간헐적으로 벌어졌지만, 예전의 기세를 되찾지 못했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연합국이 패전국과 차례로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는 종결되었다. 이로써 전후처리 과정에서 국제적 합의를 통한 조선의 독립 가능성은 좌절되었다.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


그러나 3·1운동은 200만 명이 참가한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 되었다. 말 그대로 3·1운동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엔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방편으로 남북의 두 기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경영했다. 일제는 동양의 평화와 문명화를 내세워 식민지민의 협조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문명화는 기형적이고 성급하며 폭압적이었다. 일제는 경제개발만 하면 문명화가 된다고 생각했고, 조선인과 조선의 문화를 ‘야만’이라 치부해 무시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강요했고, 설득의 과정을 생략했으며,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헌병경찰이라는 막강한 힘으로 억눌렀다.


무단통치하에서 조선인들의 불만은 해소될 길이 없었다. 조선인의 정치 진출은 친일매국노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는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본국에서 별 볼 일 없던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에 들어와 조선인 위에 군림했다. 그들은 온갖 횡포로 조선인을 차별했고, 조선인들은 일상적인 차별과 멸시, 폭력과 공포에 노출되어야 했다.


면서기와 함께 나타나는 헌병경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몇 번이고 나타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켰다. 조선인들의 가벼운 죄는 언제나 무겁게 처벌되었다. 헌병경찰의 ‘즉결처분권’은 남용되었고, 태형을 맞고 신음하는 조선인은 늘어만 갔다. 경제적 이권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차지였고, 일본인과의 송사는 백전백패로 인식되었다.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친일파가 되는 길 외에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기 힘들었다. 일제는 교육제도에도 차별을 두어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길을 방해했다.


조선총독부는 아편과 모르핀을 생산해 공공연히 유통시켰고, 주요 도시에는 공창(公娼)을 설치해 매춘을 조장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문명이라 생각했지만, 조선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미개하고 음란한 문화일 뿐이었다. 일본인들은 칼과 무기를 앞세워 조선을 정복했지만,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꺾지 못했다.



조선인들을 격동시켰던 것


조선인들의 감정은 일본인들의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3·1운동 당시 심문기록 중에는 공중목욕탕 사용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이 나온다.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장명식은 일본이 조선인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있다며 “예를 들어 혼마치(本町)의 욕탕에 가면 조선 사람은 목욕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고 말한다. 


염상섭의 『만세전』에도 목욕탕에서 조선인이 겪는 불편을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공중목욕탕 문제는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사소한 일이 사람의 마음을 더 격동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소한 일일수록 사람을 치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적개심이나 반항심은 보통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된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소소한 언사와 행동으로 조선인에게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조선인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 구해야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동인이 된다고 했다.


조선인들은 자유를 원했다. 그들은 한 번도 자유다운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16세의 나이로 3·1운동을 경험했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말했다. 자유라는 말은 자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금덩어리처럼 생각되는 것이라고. 조선인들은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어 잘 알지 못했던 ‘자유’를 금덩어리처럼 생각하며 이를 얻기 위해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던졌다. 그들은 ‘독립’만 된다면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청년, 학생, 여성,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너도 나도 만세를 부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낸 세상


3·1운동은 조선인들의 삶과 인식을 바꿔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을 실감했고, ‘자유’를 얻기 위해,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합쳐 싸웠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다’는 것을, ‘한데 뭉쳐 행동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1운동은 조선의 보통사람들도 변화시켰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선인들을 대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다수였던 보통 사람들의 결집은 일본인들에게 공포까지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3·1운동을 통해 다수의 힘을 실감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부당한 차별과 대우에 참고만 있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하나로 뭉쳤고 만세를 부르며 다수의 힘으로 현재의 문제를 고치려고 했다. 


이렇듯 3·1운동은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일제의 압도적인 폭력과 강압으로 독립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조선인들은 그들의 통치에 동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항거했다. 이것은 3·1운동이 발생했을 때 일제 당국이 가장 우려했던 바였다. 3·1운동을 경험한 세대의 존재는 두고두고 일제의 통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였던 것이다. 100년 전 포기할 줄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이 오늘을 열었다. 자유를 얻기 위해,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 시작했던 싸움이 해방 후에도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 국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 당당히 싸우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 시작에 3·1운동이 있었다.


<참고문헌>

임경석, 「3·1운동과 일제의 조선지배정책의 변화」, 『일제식민통치연구1:1905~1919』, 백산서당, 1999 

권태억, 「1910년대 일제의 ‘문명화’ 통치와 한국인들의 인식」, 『한국문화』 61,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3.

이종민, 「가벼운 범죄, 무거운 처벌」, 『사회와 역사』 107, 한국사회사학회, 2015.

기유정, 「식민지 군중의 길거리 정치와 식민자의 공포(1920~1929)」, 『도시연구』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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