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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Apr 29. 2019

순사 피살사건의 진실

순사가 죽었다.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경찰관주재소 소장 가와바타 도요타로였다. 가고시마현 사쓰마군 출신으로 1917년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면서 부임해온 젊은 일본인 순사였다.


그는 주재소에서 북쪽으로 300미터쯤 떨어진 잔솔밭에서 발견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타박상과 창상을 입은 채였다. 머리 주변에는 피가 흥건했고, 옷은 피와 흙으로 물들어 엉망이었다. 왼쪽 팔꿈치에는 깊숙이 피부가 찢겨나갔고, 오른쪽 다리는 정강이 아래가 부러져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가장 심하게 손상된 부분은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은 뭔가 둔탁한 것으로 맞은 듯 콧대가 주저앉았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소지품들도 모두 손상됐다. 칼자루는 부러지고, 칼은 휘어진 채 솔밭에 버려졌다. 공무수첩은 속장이 모두 뜯어진 채 표지만 남았고, 권총은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범행 도구들은 현장에 그대로 남았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곤봉 10여 개와 낫 한 자루가 가와바타의 주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3월 말부터 수원, 안성 지역은 연일 계속된 만세시위로 뜨거웠다. 대개 시작은 평화로웠지만 거듭될수록 시위는 과격해졌다. 


3월 28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일본인 순사가 흥분한 군중들의 손에 맞아 죽었다. 29일 성호면 오산리에서는 체포된 시위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편국을 습격하고 일본인 상점과 가옥을 방화했다.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시위에선 면사무소와 우편국, 소학교가 불탔고, 4월 1일에는 안성군 원곡·양성면과 수원군 팔탄·반월면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에서 또다시 순사가 피살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 군경의 방화와 살인


일제 군경 당국은 ‘폭민’들이 조선의 독립을 표방하는 시위운동을 할 목적으로 주재소에 온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돌과 곤봉, 낫을 휴대하고 방화와 살인을 위해 온 것이었다고 판단하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경기도 경무부는 경시 하세베(長谷部巖) 대위가 지휘하는 검거반을 발안에 파견했다. 4월 6일 새벽 한 시 하세베의 검거반은 전격적으로 수촌리를 급습했다. 


검거반은 주요 만세시위 혐의자를 체포하는 한편, 수촌리 마을 곳곳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놀라 밖으로 뛰쳐나오자 검거반은 닥치는 대로 그들을 구타하고 총검으로 찔렀다. 야만적 공격이 순식간에 마을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결국 수촌리 마을의 가옥 대부분이 이날 밤 불타고 말았다. 


검거반의 행동은 정상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일본인 순사의 죽음에 흥분해 일탈 행동을 벌인 것일까. 만약 무자비한 방화와 살인이 이곳뿐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폭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4월 9일 경기도 경무부는 경성 헌병부대 부관이었던 헌병특무조장 츠무라(津村勇)를 중심으로 검거반을 새롭게 꾸렸다. 츠무라의 검거반은 헌병 6명, 수원경찰서장 후루야(古屋淸威) 등 순사 11명, 보병 15명을 더하여 총 32명의 병력으로 구성됐다. 경기도 경무부는 이들을 3개 반으로 나누어 현지에 파견했다.


츠무라 검거반은 4월 9일 성호면 오산리를 시작으로 11일 장안면과 우정면, 12일 음덕면과 팔탄면, 14일 송산면에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다. 이들의 검거 작전은 하세베 검거반보다 훨씬 더 폭압적이었다. 군사토벌작전을 벌이듯 거의 전 지역에서 방화를 일삼았고,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4월 23일 조선헌병대사령관의 보고에 의하면 츠무라 검거반이 이들 지역에서 체포한 조선인은 803명에 달했고, 조사 후 훈방 조치된 조선인은 1202명에 이르렀다. 검거반의 방화로 소실된 가옥은 328호에 달했고, 사망자는 45명, 부상자는 17명이었다. 이 수치만으로도 츠무라의 검거반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검거작전을 펼쳤는지 충분히 추측 가능하지만, 정작 이 수치는 헌병대에 의해서 크게 축소된 것이었다. 


하세베와 츠무라 검거반의 방화와 살상은 아주 반복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검거반의 행동이 한때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군경 상층부의 정책적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소요가 달포를 넘도록 계속되어 끝날 줄 모를 뿐 아니라 점차 위험성을 띠기에 이르러, 이제는 군대의 행동이 지나치게 신중하면 그들 폭도가 오히려 늘어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폭행을 가하거나, 완강히 우리의 명령에 대항하거나, 소요를 되풀이할 경우에 있어서, 군대는 단연 필요한 탄압수단을 사용하여, 그들이 두려워 복종하고 숨죽이도록 하게 할 것이며, 동시에 일반 민중이 서로 경계하도록 함으로써 속히 진압·평정의 공(功)을 거둘 필요가 있다.”

(「조선군사령관의 희망사항 요지」, 1919년 4월 1일)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는 한 달이 넘도록 만세시위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자 3월 12일 자로 내보냈던 총기 사용 자제 명령을 취소했다. 그는 조선인들이 두려워 복종하고 숨죽일 수 있도록 필요한 탄압수단을 사용하라고 했다. 


우쓰노미야 다로. 그의 명령이 방화를 일삼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폭압적인 진압을 불러왔다.


이 명령이 나온 후 경기도 경무부는 검거반을 조직했고, 만세시위가 벌어진 지역에서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다. 그 끝을 장식한 비극적 사건이 바로 제암리학살사건이었다.



독립과 자유의 의미


검경 당국은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조직한 주모자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을 주목했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새롭게 유력한 주모자로 떠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각 마을의 구장(현재의 이장에 해당)들이었다. 구장들은 마을의 소사를 각 동리에 보내 시위 참여를 종용했다. 마을의 말단 행정망을 만세시위에 이용한 것이다. 


장안면과 우정면의 구장들은 주변 지역에서 연일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정보를 공유하면서 만세시위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 중 몇 사람이 어느 특정한 시점에 서로의 뜻을 확인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만세시위를 함께할 동지를 확보하고, 구체적인 만세시위의 방안을 준비했을 것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심문기록과 재판기록으로 판단할 때, 장안·우정면 만세시위의 시작점은 석포리 구장 차병한과 수촌리 구장 백낙열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장안면과 우정면의 주민들은 “이제 송충이는 잡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바닷가의 간척공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뽕나무 묘목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공동묘지도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면사무소와 주재소에서 강제력을 동원해 시행하던 것으로, 장안면과 우정면의 주민들을 괴롭히던 일들이었다. 

일제 관헌은 수사초기 단계부터 여러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장안면 석포리 구장 차병한을 주모자로 지목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장안면과 우정면의 주민들은 이제 독립이 되면 자신들을 괴롭혔던 이런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독립의 의미이자 자유의 내용이었다. 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독립과 자유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만세시위에 나선 그들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강제하던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힘으로 말단의 식민통치기관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당연한 일인 것처럼 손에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었던 것이다. 파괴와 방화를 위해 독립을 표방했다고 인식한 일제 당국과 달리 독립과 자유를 얻기 위해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었던 것이다.



일본인 순사 피살사건의 진실


그럼 일본인 순사 피살사건은 어떻게 된 것일까. 만세시위자들이 처음부터 일본인 순사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다른 시위와 비교해보면 이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안성군 원곡·양성면 시위에서는 2천여 명의 시위대가 양성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인 순사보 2명은 도주해버렸고 일본인 순사만 남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장안·우정면의 시위 상황과 똑같다. 


그런데 양성주재소의 일본인 순사 타카노는 가와바타 순사와 달리 발포하지 않고 저항을 포기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그에게 만세를 부르게 했고, 주재소를 불태운 후 다른 목적지로 이동했다. 반면 송산면 사강리 시위에서는 순사 노구치 고조가 군중들의 눈앞에서 시위지도자 홍면옥을 쏴 부상을 입혔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도주하는 순사를 쫓아가 돌멩이와 몽둥이로 그를 살해했다. 


이렇듯 순사가 피살된 지역과 피살되지 않은 지역의 차이는 순사가 발포해 시위 군중을 격분시켰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여부였다. 장안·우정면에서는 어땠는가? 순사 가와바타는 도주하는 과정에서 총탄이 다 할 때까지 총을 쏴 시위군중 2명을 살해하고 1명을 부상시켰다. 그러자 격분한 군중들이 도주하는 그를 추격해 돌멩이와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장안·우정면의 시위군중은 처음부터 순사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순사의 발포에 격분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3월 1일부터 4월 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조선인에게 살해된 일본인 헌병과 순사는 총 8명이다. 이들은 모두 소수의 병력으로 시위 군중을 진압하려고 발포했다가 조선인들을 격분시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3·1운동 기간 동안 일본인 가운데 조선인에게 살해를 당한 민간인은 아무도 없다. 


만세시위의 목적은 독립과 자유에 있지, 일본인의 생명을 빼앗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기에 면사무소와 주재소, 일본인 상점과 가옥은 파괴해도 일본인의 생명은 빼앗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군경 당국은 달랐다. 단지 조선인들이 두려움을 느껴 복종하고 숨죽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조선인들을 죽였다. 그것이 한때나마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조선인들을 숨죽이도록 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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