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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Apr 22. 2019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3월 1일 오후 1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김백평, 박노영, 박쾌인은 학교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을 모아 파고다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각 교실에 들어가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있을 만세시위운동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했다. 교사들은 평소와 달리 쉬는 시간에 너무 조용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학교 내에서 불온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경성고보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인 많은 시민, 학생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덕수궁과 동대문 방면으로 나뉘어 행진을 하면서 각국 대사관을 들려 조선의 독립선언을 알리고, 조선총독부가 있는 진고개(현 충무로2가)로 집결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3·1만세시위가 시작된 파고다공원. 1899년 옛 원각사 터를 중심으로 거북 모양으로 조성되었다. 사진은 1930년 무렵 찍은 항공사진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경성고보 학생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는?


예심판사가 김백평에게 물었다.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며 조선인이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발표하면, 일본 정부나 세계 각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독립을 희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학생이니 다른 것은 모릅니다. 다만 조선은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일본과 병합되었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원래대로 독립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심판사가 박노영에게 물었다.


“조선 독립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일합방의 취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총독정치는 마치 조선을 식민지와 같이 취급하고,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하지 않습니다. 총독정치의 근본 정책은 동화정책이라 하는데, 민족을 달리하고 역사를 달리하는 두 민족이 동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다른 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날이 보고 듣는 일 중에 우리의 감정을 해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긴 것입니다.”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3월 1일 오후 3시 경운동에 있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은밀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기숙사 창밖으로 시위 군중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학생들이었다. 


학교 당국이 기숙사 문을 잠그고 학생들의 참여를 막았지만, 여학생들은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와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학생들은 종로, 대한문, 광화문, 창덕궁, 서대문 등을 오가며 만세를 불렀다. 해질 무렵 학생들은 진고개까지 진출했다가 헌병과 경찰에 포위되어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체포된 학생은 모두 30여 명에 달했다. 대부분은 다행히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어 훈방 조치되었다. 하지만 경찰과 학교 당국에 의해 주모자로 지목된 학생 2명은 풀려나지 못했다. 사범과 3학년 최정숙과 본과 3학년 최은희였다.


예심판사가 최정숙에게 물었다.

“독립운동에 찬성한 이유가 무엇인가?”


최정숙은 당당히 대답했다.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조선도 자유의 나라가 되고 싶어서 독립을 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었지만...


경성에서는 3월 5일 다시 한번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독립운동의 열기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이날 시위는 3월 1일의 시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언제나 터무니없이 축소해 기록하던 일제 경찰도 3월 1일보다 세 배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3월 5일 시위에서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선전하는 전단을 제작해 뿌린 학생들이 있었다. 사립 국어보급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채순병(16세), 중동야학교에 다니던 김종현(19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강윤(19세)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3월 5일 시위의 시간과 장소를 다르게 알고 있자 종이를 사고 등사를 해서 전단을 만들었다.  


“경고
내일 5일 오전 8시 나팔이 한번 울리면, 우리 2천만 동포는 준비해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오전 8시 30분까지 남대문 부근에 집합하라.”


채순병 등이 뿌린 전단을 보고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이름도 확인된다. 중앙학교 박경조와 정석도가 그들이다. 


“조선독립을 열렬히 희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심판사의 물음에 박경조가 대답했다.


“불평을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총독정치는 조선의 민정과 민속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론 조선의 산물을 수출할 때 고액의 세금을 부과해 조선의 공업 발전을 방해합니다. 정치적으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가 없고, 교육적으론 제도가 불완전합니다. 개인과 개인 간을 말하면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을 멸시하고 압박합니다. 이런 불평을 없애려면 독립을 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소동을 일으키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는가?”

예심판사의 물음에 정석도는 대답했다.


“만세를 부르는 것은 독립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선언서에 최후의 일각,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운다고 하였으나, 우리들 조선 사람이 독립 목적을 관철하려면 먼저 조선 사람이 그 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는가?”

“누구한테 들은 것이 아니라 나의 사상일 뿐입니다”


당시 나이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정석도가 당찬 주장을 쏟아내자 예심판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누구한테 들은 말이냐며 캐물었다. 일본의 부당한 정치와 독립만세운동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독립은 기쁜 일입니다”


3월 5일 시위에는 이화학당과 정신여학교의 학생들도 함께 했다. 3월 1일 시위 때는 학교가 만류해 참석하지 못했지만 2차 시위 때는 참여 학생의 대부분이 미리 학교를 빠져나가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화학당 고등과 3학년 노예달(19세)도 그랬다. 그녀는 1차 시위 때 프랑스영사관으로 향하던 군중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자 기숙사에서 만세를 불렀지만 학교 당국이 막아 거리로 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2차 시위 때는 짚신을 신고 담장을 넘어 남대문역의 시위 군중과 합류했다.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이 피고의 마음에 든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자립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본과 병합되어 타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독립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이런 것을 배웠는가?”

“특별히 이런 일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배운 결과 혼자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피고는 여자이면서 어떻게 이 같은 일에 참가했는가?”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독립이라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기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자이지만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3월 1일과 3월 5일 경성에서 만세를 부른 학생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불렀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제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놀라운 자발성이 그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깨를 부딪치며 한데 뭉쳐 높이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어머님!”


경성고보 학생으로 후일 소설가 겸 시인으로 유명해지는 심훈(본명 심대섭)은 서대문감옥에서 어렵게 구한 종이와 연필로 어머니께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고의적삼 차입해 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있다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심훈은 3월 5일 체포 이후 겪었던 모든 고통을 기록 삼아 몰래몰래 적어나갈 생각이었다.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 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짓무른 살을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심훈은 감옥살이의 힘겨움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그런데 글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글은 아픔과 슬픔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어딘가에 가 닿는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그려!”


왜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왜 후회하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똑같은 죄로 감옥에 온 사람들이었다. 만세를 부른 죄, 독립을 말한 죄. 그것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괴로워도 괴로워하지 않고, 슬퍼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릴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랬다. 그 큰 힘이 있어 역사가 앞으로 나갔다. 아무리 큰 폭력과 억압이 있어도 그 힘을 누를 수 있는 건 고작 10년, 20년뿐이었다.  


심훈은 그 큰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만세 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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