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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Apr 15. 2019

지하신문으로 일제에 맞서는 방법

“조선민족대표 손병희, 김병조 씨 외 31인이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하오 2시에 조선독립선언서를 경성 태화관 내에서 발표하였는데 동대표 제씨는 종로경찰서에 구인되었다더라.”  - <조선독립신문> 제1호     


독립선언서와 함께 뿌려진 여러 유인물 가운데 <조선독립신문>이란 것이 있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천도교월보 사무원 이종린이 주도해 만든 신문이었다. 독립운동의 소식을 신문으로 만들어 전함으로써 일회성의 독립선언을 보완하고 독립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기획된 지하신문이었다. 


3·1운동 기간 동안 ‘만세’가 전국을 휩쓴 시위방법이 된 것처럼,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 기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언론매체가 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인들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봉쇄당한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해왔지만, 3·1운동이 시작되자 봇물이 쏟아지듯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 <조선독립신문>은 일회성의 독립선언을 보완하고 독립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기획된 지하신문이었다.

     


독립의 무기가 된 ‘지하신문’     


“이번에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근거, 즉 조선이 스스로 원하여 합병하였다는 문서를 이완용, 윤덕영, 조중응 등 7적이 조인하고 태황제(고종)께 조인을 강박한 즉 태황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날 밤에 약으로 시해하였다더라.” - <조선독립신문> 제2호

     

<조선독립신문>은 ‘만세’와 함께 조선인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유력한 무기가 되었다. 등사기로 만들어진 신문은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조선인의 생각과 삶을 다루는 것이었기에 보물처럼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은 <조선독립신문>을 읽고 너도나도 품속에 숨겨 자신의 고향으로 가져갔고, 그 신문을 다시 등사해 고향 땅에 뿌렸다. 몇 백부에 불과한 <조선독립신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5일 오전 9시 남대문정거장에서 ◯◯한 혁명기를 앞세운 수만의 부민(府民) 대오는 독립가를 부르고 온 천지가 만세 소리인 속에서 행진하여 남대문 내에 이르니, 수백의 일본 헌병 순사가 칼을 빼들고 난자하고, 또 일본 시민이 우리 시민을 부엌칼로 마구 찔렀다. 사상자 20여 명, 체포된 자 수백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은 용감하게 행진하여 기세는 점점 더 맹렬해졌다.” - <조선독립신문> 제3호  


<조선독립신문>은 시시각각 일제의 통치를 옹호하고 감싸는 일제의 거대 언론들과 싸웠다. 그 중심에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가 있었다. 


<매일신보>는 조선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을 축소 은폐하고, 조선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참혹한 경험을 거짓으로 조작하며, 이완용 같은 친일 매국노들을 동원해 ‘독립불가론’을 유포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멈추려 했다. <조선독립신문>은 그들의 의도적인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반영한 소문과 열망을 드러내는 격문으로 ‘거짓’에 맞섰다.

   


거짓에 맞서 싸우는 법     


“경성일보가 프랑스 영사의 말이라며 ‘이번 소요는 아이들의 놀음이며 무익한 놀음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는데, 그 영사는 털끝만치도 이런 말을 한 일이 없다고 분노했다고 하니, 공공의 신문이 이와 같이 거짓말을 한 것을 보니 일본의 전체를 가히 알 수 있도다.”  - <조선독립신문> 제13호   

  

<조선독립신문>을 제작한 이는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시작은 이종일과 이종린이 했지만 그들이 체포되자 경성서적조합 서기 장종건과 그의 친구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가 붙잡혀가자 장용하 팀이 그 뒤를 이었고, 장채극 팀이 그다음을 담당했다.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도 있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자발적으로 그 뒤를 잇기도 했다. 3월 1일 시작된 <조선독립신문>은 그렇게 그해 8월까지 이어졌다.      


“우리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이래 죽음을 각오한 수천의 동포와 감옥에서 신음하는 수만의 동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더냐. 우리 동족 때문이다. 정의 인도와 민족 자결의 천명을 위한 평화 세계에 유독 우리 동족만이 박멸되고 고통을 받는 것은 통분의 극(極)이다. 마른나무, 다 타버린 재가 아닌 민족이여, 새장 속에 갇힌 새, 가마 속의 물고기가 아닌 동포여, 전 생애의 박멸을 앉아서 당할 것이냐. 조국을 위하여 선진(先進)을 위로하고 후생(後生)을 이끌며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결사의 각오로 맹진 노력하여 필생의 관문에 도착할지어다.”  - <조선독립신문> 제9호 부록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다.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기 지하신문의 원형을 만들어내며 조선인을 대변하는 입이 되었다. 한 번 열린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고, 다른 많은 이들에게 말하고픈 욕구를 일깨워주었다. 조선에 수많은 지하신문과 격문이 범람하게 된 이유였다. <각성호회보>도 그중 하나였다.      



“철함 대포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3월 8일부터 11일 사이, 경성 광희동 주변에 <각성호회보>라는 제목의 지하신문이 뿌려졌다. 경성본정경찰서 소속 조선인 순사보 김진택은 경기도 경무부 사찰반으로 파견되어 활동 중,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그는 호리이 등사당을 탐문하다가 주인에게 최근에 등사기를 구입한 조선인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추격했다. 


순사보 김진택은 두 명의 조선인을 긴급 체포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2학년 양재순과 노끈장수 김호준이 그들이었다.


양재순과 김호준은 어릴 적 같은 서당에 다녔던 친구였다. 두 사람은 3월 7일 밤 우연히 시국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최근 들어 독립선언서라든지 경고문 같은 문서들이 집에 배달되는 경우도 있었고, 교회당 벽에 독립에 관한 벽보가 붙은 적도 있었다는 얘기에 이르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도 무언가 인쇄해서 배포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다음날 양재순은 남대문통에 있는 호리이 등사당에 가서 등사기를 사왔다. 비용은 김호준이 부담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김호준의 집에서 <각성호회보>를 만들었다. 원고는 양재순이 그동안 보았던 <조선독립신문>과 독립선언서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썼고, 인쇄는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해서 150부를 찍었다. 양재순은 인쇄된 격문을 광희동 주변의 주택에 뿌렸다. 두 사람이 살던 동네였다. 


양재순과 김호준은 <각성호회보>를 제1호부터 제4호까지 찍어 배포했다. 3월 8일 150부를 시작으로 3월 9일 80부, 3월 10일 100부, 3월 11일 80부를 인쇄해 배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활동을 시작한 지 4일 만에 들통이 났다. 호리이 등사당의 일본인 주인이 조선인 구입자 양재순에 대한 정보를 가감 없이 제공한 데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거주지에 격문을 뿌린 것이 추격의 불씨가 되었다.


조선을 독립시키고 싶어 <각성호회보>를 만들었던 학생 양재순(좌)과 노끈장수 김호준(우).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하지만 조선을 독립시키고 싶어 격문을 만들었다던 양재순과 김호준은 4일 동안 <각성호회보>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성호회보> 제3호에 이렇게 썼다.      


“2천만 동포의 영혼과 삼천리강산을 가진 우리 민족은 맨손임을 걱정하지 말라. 철함 대포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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