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한성 Apr 01. 2019

만인이 죽어 백만 인을 살리는 길, 인종익

“경찰이 범죄자로 지목한 모든 사람은 사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체포를 자행한다. 또 한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그의 친척 친구에 주련(株連: 연좌)하여 사실 유무와 경중을 불문하고 신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혹형을 시행한다. 그리하여 인사불성이 되게 하여 여러 날을 감금한 뒤에 비로소 신문하기 시작한다. 또한 혹독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여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백만으로써 죄를 성립시킨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


경찰의 고문은 혹독했다. 그러나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印宗益)은 경찰의 온갖 고문에도 진실을 숨기며 이틀을 버텼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몇 천 부를 전주와 이리(현재의 익산)의 천도교구에 전달하고 온 후였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한 채 처음부터 청주에 선언서를 배포하러 왔다가 배포해보지도 못하고 붙잡혔다며 애써 진실을 은폐했다. 자신이 전달하고 온 선언서가 전라도 각지에 퍼져나갈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선언서를 배포한 후 그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각지에서 폭동소요를 일으킬 작정이었는가?”


“그건 아니오. 우리의 목적은 민족자결주의를 널리 알리고, 우리 민족에게 독립 의지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오.”


인종익을 심문했던 청주경찰서 경부 이성근(李聖根)은 그의 대답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도대체 이렇게 무모한 일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성근의 질문에 인종익이 답했다. 


“우린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지금이 가장 적기이고,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이 이것이라 생각하오. 원래부터 성공을 기대하고 한 일은 아니었소. 하지만 이번에 실패하면 누군가가 우리 뒤를 이을 것이오. 100명이 죽으면 100명이 나올 것이오. 인심은 물이오. 한강이오. 아무리 막아도 물은 새어나오게 되지 않겠소?”


무명의 보통사람이었지만 인종익은 생각까지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수많은 ‘인종익’들과 만세시위


경찰서에 붙잡혀 온지 3일째 되는 날, 인종익은 드디어 자신이 천도교 전주교구에 선언서 1,800부를 전달하고 온 사실을 털어놨다. 이성근은 곧바로 전주경찰서에 전보를 쳐 수사를 의뢰했다. 


며칠 후 전주경찰서의 수사결과가 도착했다. 인종익이 천도교 전주교구에 선언서 1,800부를 놓고 간 것이 맞으며, 더불어 이리도 다녀갔다는 내용이었다. 


인종익이 이리까지 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성근은 이리에 전달한 선언서가 몇 부나 되는지 추궁했다. 인종익은 전주교구에 전달했던 1,800부 가운데 몇 부를 함께 동행했던 전주교구 사람이 몇 부 들고 가 이리에 전달했다고 변명했다. 이리교구에 전달된 선언서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이리교구에 대한 수사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3월 1일이래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만세시위는 경찰 인력의 심각한 부족을 초래했다. 그것이 수사를 부실을 가져왔고 진실을 은폐했다.


인종익이 이리교구에 전달한 선언서가 얼마나 되는지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진술과 인종익의 진술을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인종익은 처음에 이종일에게 받은 선언서가 2천 부였다고 말했지만, 이종일은 인종익에게 모두 3천 부를 줬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이종일의 진술이 맞다면 인종익은 이리교구에 적어도 1천 부 정도의 선언서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종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책임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인종익이 이틀간 진술을 늦춘 사이, 전주와 이리에 전달된 선언서는 천도교 조직망을 타고 전라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만세의 물결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의 수많은 인종익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럼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


“당신은 이번 사건의 동기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이성근이 인종익에게 물었다. 사건의 본질을 따져 인종익의 죄질을 명백히 할 요량이었다. 


“경술년의 비운은 참으로 슬픈 일이오.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 타국의 노예가 되었으니 이처럼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소? 기회를 엿보던 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으니, 이는 전 세계가 자치를 받아들이는 기운이라. 이와 같은 천재일우의 기회는 또 없을 것이요. 그래서 온 국민이 피눈물로 독립자치를 절규한 것이오.” 


“조선을 독립시키려면 미국은 필리핀을, 영국은 인도를, 프랑스는 베트남을 독립시켜야 할 것이다. 이는 미국과 영국이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해치는 일이 될 터인데 그들이 과연 그렇게 하겠는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까닭은 천하의 어느 나라도 식민지의 자치를 허락하고 독립 생존을 보장하여 정의·인도를 관철시키려는 것이오. 결국 조선을 독립시킬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식민지도 모두 자치를 허용하기에 이를 것이오.”


“그리 말하는 걸 보면 그대는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모의에 참여한 발기인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성근의 말에 인종익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난 발기인이 아니오. 당신이 묻기에 단지 나의 이상을 말했을 뿐이오.”


“그대의 경거망동으로 다수의 사람이 징역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래도 좋은가?”


인종익이 말했다. 


“만인이 죽어 백만 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것이오. 만인을 죽이면 만인의 피가 백만을 물들이고, 백만을 죽이면 백만의 피가 천만을 물들일 것이오. 그럼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


“그대가 감옥에 들어가면 가족은 어떻게 하나?”


“지금 내 가족을 걱정해주는 것이오? 내 가족은 가족대로 자활의 길을 구할 것이오.” 



이 길이 독립의 길로 이어지기를


인종익은 예심부터 최종심까지 10개월이나 지속된 긴 법정투쟁 기간 동안 내내 당당히 일제에 맞섰다. 그는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선언서를 전달한 것은 치안을 방해하고 누군가를 선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정당하게 주장하고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길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세대를 넘어 계속되는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이 지나간 길을 똑같이 걸어가기를, 그래서 그 길이 점점 넓어져, 독립의 길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1920년 8월 24일 인종익은 서대문감옥에서 만기 출옥했다. 1919년 3월 2일 체포되었으니 1년 5개월 23일 동안 수형생활을 한 셈이었다. 그의 기록은 여기서 끊긴다. 이후 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가 만든 그의 신상카드에는 사진마저 빠져 있다. 수감될 때 찍은 머그샷이 분명 있었을 텐데, 웬일인지 그의 카드에는 사진이 없다. 신상카드를 만들던 시점에 이미 분실되었는지 ‘사진 없음’이라는 글자만 선명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종익의 신상카드. 무슨 일인지 그의 사진이 빠져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전 05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강기덕과 학생 지도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