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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성 Apr 08. 2019

그저 당연한 일을 했던 열아홉 살 소년, 김동혁

전하지 못한 편지


작은아버님께 올립니다. 


천지를 진동하는 만세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고 총을 잡고 칼을 든 양반이 시위를 하는 이때에 나라의 활동가는 분주히 힘을 다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오리까. 사방에서 형사가 활동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오리까. 

전일 저의 비밀행위는 알고 계시다시피 선언서 배달과 독립신문 1·2호의 배달과 기타 호의 배달의 책임으로써 지금까지 사방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하숙집에는 혼자만 숙박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므로 자연히 주목을 받은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작은 일로 그들에게 체포되어 수일간 구류를 당하는 것은 실로 유감으로 생각되지만 어떻게 하오리까. 

죄송하지만 저는 서울을 떠나오니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후일 독립기가 휘날리고 전승고(戰勝鼓), 독립고(獨立鼓)가 울릴 때는 서울을 떠난 일이 면목 없는 일이 되겠지요. 숙부님 몸조심하시고 만사가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배재고보 2학년이던 열아홉 김동혁이 체포 당시 헌병보조원에게 빼앗긴 편지에는 불행히도 3월 1일 이후 그가 한 일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의 배달, 그리고 기타 격문의 배달이 그가 맡은 일이었다. 



가벼운 죄, 무거운 처벌


경찰의 추격이 본격화되자 김동혁은 친구 두 명과 함께 고향 홍천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홀로 경성에 남을 작은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다. 동혁보다 여덟 살 위인 작은아버지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동혁은 작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고향행을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편지를 전달하지 못했고, 품속에 넣고 있다가 체포와 함께 헌병에게 편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편지는 부인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증거가 되었다.


김동혁은 편지에 적힌 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거주지 인근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조선독립신문》도 배포했으며, 그 자신에게 전해진 각종 격문들도 배포했다고 진술했다. 


편지라는 증거가 있는 이상, 자신이 부인한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될 순 없었다. 하지만 김동혁은 친구들에 대한 것, 작은 아버지에 대한 것은 모두 부인했다. 자신의 진술로 그들의 죄가 늘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편지에 썼듯이, 김동혁은 자신이 한 일이 그렇게 큰 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체포된다 해도 수일간 구류를 당하다가 풀려나리라 생각했다. 조선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한 것이 뭐가 그리 큰 죄이겠는가. 


하지만 일제는 3·1운동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가능한 한 무겁게 처벌하려고 애썼다. 마치 그래야만 독립운동이 재발하지 않을 것처럼 동원 가능한 모든 법 조항을 끌어오고, 새로운 법령까지 제정하며 조선인들을 옥죄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영원히 조선인들의 저항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저항의 연유가 그들의 통치 자체에 있는 한, 그것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열아홉 김동혁이 만세를 부른 이유


김동혁은 잡히기 전에는 한없이 두려워했었지만, 막상 잡히고 시간이 지나자 갈수록 용기가 났다.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것, 신문과 재판을 받는 것, 그리고 비좁은 감옥방에서 온갖 벌레와 악취와 싸우는 것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시간은 흘렀고 그런대로 삶이 이어졌다. 


지금의 어려움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고통은 언젠간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된 김동혁.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동혁의 아버지는 일본인 변호사까지 고용해 아들을 변호했다. 하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검사는 동혁에게 1년 6개월의 실형을 구형했고, 판사는 동혁의 혐의를 모두 인정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동혁은 항소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같이 붙잡힌 친구, 선생님보다 더 긴 형을 받았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하며 만세를 불렀던 동혁은 어떤 마음으로 이 일들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심에서 그가 한 말이 진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동혁이 예심판사 앞에 서자 예심판사가 물었다. 


“피고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 


동혁이 대답했다. 


“난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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