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어비앤비 Feb 21. 2020

여자 셋이 살고 있습니다.

한 달 휴가의 마지막 여정, 리스본에서


한 달 휴가가 생겼다


한 달 휴가가 생겼다. 퇴사도 아니고 이직도 아니다. 회사에서 준 공식적인 휴가였다. 처음에는 당사자인 나조차 이런 반응이었다.


‘정말 한 달이나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까 매일 하는 생방송도 빠져도 되는 거라고?’


그동안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5년에 한 번 사회문화체험으로 2주간의 휴가를 주었는데, 제도가 개편되며 올해 처음으로 기간이 한 달로 늘어난 것이다. '와 복지 짱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렴풋이 듣기로는 회사의 악화된 재정상황 때문에 휴가 일수를 늘린 것이라고 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직원 입장에서 공식적으로 한 달을 쉴 수 있는 건 얼떨떨한 행운일 수밖에.


이 얼마나 소중하고 소중한 시간인지. 취업에 뛰어든 이후 직장 생활을 지나온 만 10년 간,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이상 휴가를 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작년에는 스스로 휴가를 반납하고 자발적 열혈 일꾼으로 살아왔다. 그때는 휴가를 잊을 만큼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인생의 ‘한창 일할 때’라는 것이 이 시기가 아닐까 할 만큼 일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1년 넘게 주 6일 방송에, 일요일 근무까지 겹치면 한 달에 쉴 수 있는 날이 하루 이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일을 마친 후에는 유튜브 운영과 북토크 등 여러 개인 작업들을 추진하며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4~5시간 자고 다시 새벽 출근하는 생활은 열정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매일이었다. 직장인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동시에 하려면 무엇이든 대가가 따르기 마련 아니겠나. 개인 활동이 본업에 지장을 준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는 내게 선배는 '지치지도 않는 너는 로봇이구나’ 하며 임아나 로봇설을 붙여주었다. 그렇지만 어찌 로봇일 수 있을까.


결국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방송을 하기 전 숨 쉬기 힘든 증상과 함께, 멘트를 하면서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호흡이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가끔 심장이 쿡쿡 아프다는 느낌도 받았다. 잠이 부족해서겠거니 슬렁 넘기다가, 어느 날부터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몸이 따라오질 못하니 이내 하루하루가 부담으로, 일이 진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끔은 눈물도 났다. 위험한 신호였다. 쉬어야 했다. 미루어왔던 한 달 휴가 옵션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한 달 휴가를 핑계로 모든 것을 멈추고 당연하게 살아오던 하루하루를 낯설게 바라보고 싶었다.


여러 선택지 앞에서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한 달 중 얼마나 길게 여행을 떠날 것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예산은 얼마를 잡을 것인지, 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 등등. 이런저런 조합으로 가까운 제주도 한 달 살이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엄마와 여행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혼자 유럽으로 떠나기로 정했다. 인생에 또 언제 이렇게 마음 편히 돌아올 곳을 두고 혼자 여행을 떠나볼 수 있겠는가. 언제일지 모를 다음은 기약하고 싶지 않았다.


휴가 때마다 혼자 여행을 곧잘 떠나곤 했지만, 혼자 하는 한 달 여행은 가늠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일주일 휴가에서는 예산을 적절히 예상해 모두 환전해 갔지만 이번에는 얼마가 소요될 지 예측이 잘 되지 않았다. 또 이제 막 재미가 붙거나 피곤해질 때쯤 휴가가 끝났지만 이번엔 어떨까. 많이 외롭고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 하지만 또 그 틈새로 예측하지 못한 인연과 시간이 채워지리라 기대도 되었다.


여행 코스를 수차례 바꾼 끝에 4주 간 유럽 여행 일정이 정해졌다. 동유럽에서 출발해 부다페스트, 프라하, 비엔나를 거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일정으로 총 2주를 보내기로 했다. 이후 후반 2주는 포르투갈에서 느긋하게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로 했다. 대망의 마지막 여행지는 리스본(Lisboa)이었다.




혼자 떠나 셋이 된 리스본 여행


‘드디어 리스본 숙소에 도착했어.’


언니와 제이제이가 있는 단체 카톡방에 문자를 남겼다. 둘은 포르투갈에서부터 함께 여행을 하는 동행들이었다. 본래라면 철저히 혼자일 것을 예상했었지만 기가 막히게 여행 일정이 딱 겹친 회사 동기 제이제이와, 마침 휴직을 해서 포르투갈로 올 수 있었던 언니가 우연히 함께 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여행이 된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이 익숙하기도 하고 또 고집했던 내게, 동행과 함께 하는 여행은 어떤 면에서는 걱정도 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싶었던 건, 우선 제이제이와 언니는 초면이었지만 미식과 와인에 대한 취향 합치로 급속히 친해져 내가 중간에서 별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따로 또 같이 여행으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것이 핵심이었는데, 각자 혼자 있을 시간과 공간을 지켜준 것이다. 포르투(Porto)에 있는 9일 간 우리는 낮에 만나 같이 여행하고, 헤어져 따로 여행하다가 저녁에 다시 만나 다정한 식사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헤어질 땐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적당하고도 필요한 외로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5박 6일은 숙소를 셰어 하기로 했다. 여행의 마무리는 축제처럼 떠들썩 해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본격 ‘여자 셋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의 시작이었다.


리스본 숙소에는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하게 되었다.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호스트가 보낸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11시에 빌딩 앞에서 만나요’. 호스트도, 사진 속에서만 확인했던 집도, 막상 실제를 만나기 전엔 늘 이렇게 설렘 반 걱정 반이 혼재했다.


셋이 한국에서 함께 사진을 보며 고른 숙소였다.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에어비앤비를 선택하자는 데는 처음부터 이견이 없었다. 혼자나 둘이라면 호텔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셋 이상이 되는 순간 에어비앤비의 널찍한 집을 상상하는 것은 당연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 취향 다른 셋이 함께 머물 숙소를 고르자 하니 고려해야 할 점이 더 많았다.


“각자 방을 쓸 수 있게 방이 3개면 좋겠어”


나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위치, 인테리어 등등은 나보다 더 꼼꼼하고 미적 센스가 뛰어난 둘을 따르기로 했다. 옵션에서 먼저 방이 3개인 집을 골라 리스트에 담고, 이후 중심지에서 너무 위치가 먼 곳은 덜어내고, 마지막으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른다. 비용은 1/3이니 부담이 덜 했는데 가격마저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단계를 거쳐 고른 집은 위치부터 인테리어까지 우리 셋 모두 고민 없이 ‘합격’을 줄 만큼 마음에 쏙 들었다.


택시가 숙소와 가장 가까운 골목의 어느 지점에 나를 내려주었다. 숙소 앞까지 차가 진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속으로는 제발 숙소가 이곳에서 가깝기를 간절히 바랐다. 캐리어가 30킬로그램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인지 이쯤에서 만나기로 한 호스트가 보이지 않았다. 택시가 잘못 내려준 것일까 불안이 엄습해 오는데, 다행히 호스트가 남겨준 전화번호가 있어 곧장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내 들려오는 친절한 목소리. 내 앞에 있는 건물 번호를 불러주자 잠시만 기다리라며, 본인이 거기로 가겠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낯선 골목에 무거운 캐리어 짐짝을 두고 호스트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잠시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랗고 맑은 리스본 하늘. 너무 좋았다. 포르투에 머문 열흘 중 8일 이상 비가 내렸기에 이곳의 쨍한 하늘이 너무도 반갑고 또한 비에 젖지 않고 캐리어를 끌 수 있다는 사실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이 낯선 골목은 내일이면 이내 익숙해지리라.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반갑게 인사를 건넨 호스트의 이름은 대니얼(Daniel)이었다, 세상 인상 좋은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대니얼을 따라 골목길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7번이 적힌 초록색 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기구나, 앞으로 우리가 머물 곳’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과 거대한 짐짝 앞에 난감한 표정을 짓자 대니얼은 당연하다는 듯 짐짝을 가뿐하게 들어 3층까지 옮겨주었다. 호스트의 친절에 속으로 이 숙소는 이미 만점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숙소는 사진 속 모습 그 이상이었다. 아름답고 깨끗하고 감각적이었다. 우리의 안목을 마구 칭찬하고 싶었고 그보다 이런 멋진 숙소를 여행자에게 제공해 준 대니얼에게 내가 아는 온갖 영어 감탄사를 쏟아냈다. 대니얼이 떠난 후 창가에 기대 골목을 내려다보며, 다시 하늘을 보며, 그리고 다시 숙소를 둘러보며, 나는 리스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에그타르트와 트램, 그리고 단골집


제이제이가 향이 나는 샤워 헤드로 교체해준 덕에 매일 아침 향기 나는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셋 중 주로 가장 먼저 일어나던 나는 일찍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리스본에서 숙소는 같이 사용했지만 여전히 여행 일정은 따로 또 같이 했다. 여행지가 어디건 동네의 근사한 카페를 찾는 건 내게 가장 즐겁고도 신나는 일인데, 그렇게 발견한 카페에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며 행복함을 느꼈다.

어느 날에는 스냅사진 작가를 만나 리스본 골목 곳곳을 다니며 멋진 사진을 찍었다. 본래 포르투갈에서 사진 작업을 하기로 했었지만 계속 비가 내려 떠날 때까지 날짜를 정할 수 없었는데, 운이 좋게 작가님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리스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리스본에서의 스냅 촬영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날씨는 사랑스러웠고 거리엔 여행자들의 기분 좋은 설렘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코메르시우 광장에 정차해 있는 빨간색 트램을 시작으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촬영하다가 배가 고파지면 에그타르트와 커피로 잠시 당을 보충했다. 포르투갈에 머무는 내내 1일 3 에그타르트는 필수였는데, 어쩜 이렇게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지금도 가끔씩 그리워지는 그 노란 에그타르트의 맛.


에너지가 차오르면 다시 골목을 걸었다. 잠시 뒤 석양이 질 무렵을 기다리면서. 보랏빛과 옅은 파란색의 오묘한 해 질 녘 하늘이 드러나는 찰나, 사진기의 셔터 소리와 함께 평생 간직될 순간으로 남았다.


촬영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는데 이번엔 아침 일찍 28번 노란색 트램을 타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직 얼굴에 부기가 남아 있을 만큼 이른 아침이었다. 리스본의 상징과도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노란 28번 트램은 늘 관광객들에게 최고 인기 코스인지라 조금만 늦어도 줄을 서서 타야 했고, 그렇게 되면 내부에서의 촬영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트램 안의 멋진 사진은 아침의 부지런함이 큰 몫을 한 것.

리스본의 경쾌한 날씨와 어울리는 사진 속 원피스들은 집 근처에 단골 의상집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어느 날 숙소로 향하던 길에 색감이 쨍한 빨간 원피스가 눈에 띄어 이끌리듯 들어간 옷가게는 내 취향의 원피스로 가득했다. 들를 때마다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는 원피스를 발견했기에 쇼핑 시간은 10분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단골 카페, 단골 식당, 단골 옷가게가 생긴다는 건 시간이 흘러 여행의 많은 기억이 증발되더라도 나만의 아지트로서 오래 기억될 일이다.



우리의 완벽한 숙소


각자 시간을 보낸 후 저녁 즈음이 되면 숙소에서 다시 셋이 모여 어디에서 밥을 먹을지 궁리를 했다. 숙소가 번화가에 위치해 있어 대문만 나가면 파두(Fado, 포르투갈의 민요) 공연과 재즈 바를 즐길 수 있어 좋았다. 대신 그만큼 늦은 시간까지 창밖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소리들로 잠을 설치는 날도 있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와인이라고 생각한 그린 와인을 나는 거의 매일 밤 마셨는데, 그렇게 함께 밤늦게까지 와인을 홀짝이다 돌아오더라도 걸어서 귀가하는데 문제없었다. 함께였으니까. 다시 돌아와서는 거실 테이블에 모여 각자 작업을 하거나 못 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든다.

이렇게 누군가와 공간을 나누는 시간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친밀함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생활 습관과 취향의 침범이랄까. 자연스레 옷이나 화장품을 빌려주기도 하고, 보다 시시 껄껄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한 집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세 자매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셋 모두 여자 형제가 없어 이런 형태의 조합이 신선하고도 재미있다 느끼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셋이 한 집에 머문 5일은 함께 하는 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하고, 또 함께 하는 삶을 적극 꿈꾸게 해 준 시간이었다.


여행자의 빼놓을 수 없는 로망 하면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것 아닐까. 리스본의 에어비앤비는 그렇게 꿈꾸던 ‘일상 같은 여행’이 실현되는 공간이었다. 창가 너머로 다른 집의 빨래 향을 실은 바람을 맞을 수 있는, 맞은편 베란다의 강아지와 인사할 수 있는, 주황색 지붕이 펼쳐지는 풍경을 보여주며 인스타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좁은 호텔이나 방 한 칸에 몸을 욱여넣는 것이 아닌 여럿이 북적북적 머물 수 있는, 현지에서 빌린 집이지만 잠시 소유할 수 있는 집. 우리가 머문 이 완벽하게 아름답고 섬세했던 에어비앤비는 리스본 여행자의 로망을 실현시켜 주었다. 아, 한 달의 휴가를 지나며 내 몸도 마음도 치유되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분명한 변화들이 있었다. 


창가로 따뜻하게 드리우던 그곳의 햇살이 그리워진다.




에어비앤비 작가, 임현주

건강한 삶을 지향합니다. 일을 좋아하지만 일만 하다 죽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인스타그램 @anna_hyunju

브런치 @traveldays

매거진의 이전글 익숙한 이들과 떠난 낯선 여행, 방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