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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복 Oct 30. 2022

소설 환취 (6화/25화)

6. 할아버지 경비원

6. 할아버지 경비원      


 다른 경비원분은 저와 근무하는 날이 달라서, 가끔 용역회사 일로 전달사항이 생기지 않는 이상 따로 연락할 일이 없었어요. 게다가 저보다 오래 근무한 직장 선배이신 데다, 저와 말도 잘 안 통할 것 같은 할아버지 경비원분이셔서 사적으로도 알고 싶지 않았고요. 오래전 저에게 크게 사기를 치고 자취를 감춘 사람이, 그 당시 직장 선배였거든요. 그래서 직장 내에서 개인적인 친분을 갖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혹시나 땅콩이가 제가 없는 날, 할아버지 경비원분을 마주쳤다가 불행한 일을 당할지도 몰라서, 처음으로 안부전화를 드리며 확인해 보기로 했어요. 매번 출근하면 보게 되는, 전날 근무한 할아버지 경비원분이 남긴 흔적들이 절 불안하게 만들었거든요. 특히 근무 일지의 특이 사항란엔, 저에게 보란 듯이 남긴 메시지 같은 것들이 자주 있었어요. 날씨가 추우면 '순찰 중 수도관 동파방지 유념할 것.', 태풍이 불면 '순찰 중 시설물 상태 점검할 것.', 비가 오면 '순찰 중 건물 내 누수 유무 확인할 것.' 등 저도 알아서 할 수 있는 사항들을 적어놓곤 하셨어요. 아무래도 꼼꼼하게 기록한 근무 일지들이나 퇴근하면서 깔끔하게 청소한 경비실의 상태를 보면, 근무 중에 길고양이를 마주쳤을 때 가만둘 성격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한편으론 종교적인 생활도 하시는 듯해서 작은 생명에게 관대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요. 경비실에 항상 성경책이 있더라고요. 일을 마친 뒤 남은 흔적들엔 그 사람의 생활습관과 성격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법이거든요. 마침 명절 연휴 근무의 시작이라 연락할 좋은 핑계도 있던 상태였어요. 

      

 경비원 일자리를 얻었을 때, 딱 한 번 야간에 근무 중이시던 할아버지 경비원분을 찾아가 인사를 드린 적이 있어요. 첫인상은 편안한 분위기에 말씀도 부드럽게 하셨지만, 전 예상치 못한 백발의 노인이라 속으로 많이 놀랐었죠. 석 달 일하고 퇴직했던 전임자의 마지막 근무 날, 업무를 넘겨받으면서 다른 경비원분이 나이가 많다고만 들었지 설마 할아버지이실 줄은 몰랐거든요. 보통 회사에서는 청년층에서 중년층까지 경비원으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분은 워낙 오래 계셔서 그대로 근무하시는 모양이었어요. 용역 경비원이라도 아무 사고 없이 일 잘하면 동일한 근무지에서 장기근무도 가능했으니까요.


 할아버지 경비원분께 간단한 제 소개와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드렸어요. 그분은 저에게 야간에 일하려면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거나, 경비원은 일하다 화나는 일이 생겨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거나, 어려운 일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등의 전형적인 노인의 당부가 담긴 말씀들을 하셨고요. 그 뒤로는 용역회사에서 경비실로 보낸 택배나 우편물을, 제가 출근해서 먼저 확인하게 된 경우에만 연락을 드렸어요. 새 유니폼이나 명절 선물세트, 근로자의 날 기념 선물, 서명이 필요한 서류 같은 것들을 용역회사에서 보내곤 했거든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엔 노년에 이른 분과의 소통에서 무언가를 배울 것도 없으려니와,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았어요. 그분과 소통하면서 시간과 정신을 소비하느니 차라리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보고, 듣는 게 훨씬 유익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죠. 옛날에는 노인분들의 인생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울 게 있었을지 몰라도, 2000년대 들어서 더욱 광활하게 열린 인터넷 시대엔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이미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란 공간에 멋진 인생의 사색이 담긴 말들을 수없이 많이 게시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노인분들의 말씀은 단순하잖아요. 제가 만약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려서 안절부절못하게 되었을 때 들을 말도 뻔했어요. 그냥 "힘내시게…." 이런 식이죠. 거기에 종교까지 있으면 하나님이 어쩌고, 부처님이 어쩌고, 성경 말씀이 어쩌고 하는 무교인 저에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 덧붙여질 테고요. 그에 반해 젊은 사람들은 시작하는 말부터가 달랐죠. "당신이 힘들 때 당신은…." 하면서 사실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외국 사람들이 한 것 같은 멋있는 말들도 소개하면서 무언가 감정을 울렸거든요. 노인분들 말씀에는 그런 게 없다고 느꼈어요. 멋과 감정의 울림이요. 그래서 소통하기가 더 싫었죠. 하지만 땅콩이를 위해서 처음으로 사적인 전화를 드려봤어요. 전화를 받으시자마자 마치 오랜만에 전화 온 아들의 전화를 받는 것 마냥, 노인 특유의 느릿하면서도 반가운 톤이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어이구! 오랜만이에요.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닙니다. 이제 명절 연휴이기도 해서 안부 화드렸습니다."


"아! 그래요. 고마워요. 난 또 갑자기 휴일에 전화가 오길래 무슨 일이라도 났나 했어요."


"네, 회사에는 아무 일 없습니다."


"우린 명절에도 출근을 해야 하니 참 이럴 땐 안 좋아요. 그래서 비번인 날 명절 음식이라도 먹으면서 잘 보내야 해요. 시장에서 모둠전 한 근 사다 먹으면 명절 기분이 좀 날 거예요. 나도 한 근 사다 먹었어요.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쯤 들어오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곧 있으면 일한 지 1년째 됩니다."


"세월이 참 빠르네요. 그동안 결근 한번 없이 잘해줘서 고마워요. 계속 같이 일하면 좋겠네요."


"네, 전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특별히 갈 곳도 없고 여기 근무가 저한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나도 오래 근무해서 그런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계속 여기서 일하면 좋겠다 싶어요. 새벽엔 휴게 시간도 있고 한가할 텐데 뭐하고 보내나요?"


"잠깐 눈 붙이러 휴게실 가기도 번거롭기도 하고, 혹시 누가 올까 봐 그냥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렇습니다."

     

"나도 비슷해요. 이젠 늙어서 그런지 밤잠도 없어져서 새벽엔 달이나 한참 보고 있다가 성경 책을 보곤 해요."


"아… 네, 하늘에 있는 달 말씀입니까?"


"맞아요. 달을 보고 있으면 꼭 사람 마음을 보는 것 같아요. 동그랗게 제 모양이 다 있다가도, 하루 지나면 그 모습을 조금씩 잃어가잖아요. 그러다 완전히 제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면 또 다음 날부턴 반대로 열심히 자기 모양을 다시 채워나가고요. 그렇게 시간이 걸려도 제 모습을 잃었다 찾아가는 게 참 구경거리예요."


"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달을 매일 구경하시는 겁니까?"


"그럼요. 궂은 날씨 때문에 달이 안 보여도 지금쯤 어느 정도 모양을 잃었겠거니, 채웠겠거니 하면서 보는 거예요. 우린 밤에 일을 해와서 쉬는 날에도 늦게 잠들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달도 구경하고 성경책도 읽고 그러죠. 참! 집에 성경책이 한 권 더 있고 해서 근무할 때 보는 건 경비실 안에 두었어요. 혹시 심심할 때 한 번씩 보도록 해봐요. 도움이 될 거예요."


"아, 아닙니다. 전 종교를 가질 생각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강권하는 건 아니니 부담 갖지 말아요. 가끔 성경 구절을 음미하다 보면 약해질 때 힘을 얻는 경우도 있어서 이야기해 본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시간 날 때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요?"


"이제 일도 다 익숙해서 어려운 건 없습니다. 그런데 사료공장에 사는 고양이들이 가끔 이쪽으로 넘어와서 돌아다니는 게 신경 쓰이긴 합니다."

     

"아! 그 고양이들이요. 고양이 보면 무조건 쫓아내야 해요. 빗자루를 들어서라도 우리 쪽에 영역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등에서 꼬리 쪽까지 회색과 검은색 알록달록한 무늬 있는 고양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고등어 줄무늬랑 비슷합니다. 그 고양이가 요즘 자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어두운 데다 눈도 침침해서…. 그리고 고양이들이 생김새가 비슷비슷하잖아요. 그런데 고양이란 게 한번 자기 영역이라고 여기면 계속 오는 법이에요. 그래서 눈으로 보고도 그냥 넘어가 주고 그러면 안 돼요. 사정이란 게 한두 번 봐주고 끝나는 일이나 해주는 거지, 끝까지 챙길 자신 없으면 함부로 사정 봐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쫓아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명절 잘 보내십시오.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전화도 넣어주고 고마워요. 그럼 명절 잘 보내고 수고해요."


 역시 예상했던 뻔한 말들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성경 말씀 어쩌고 하시는 걸 듣고 심적인 거리가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았어요. 멋과 감동이 없으면 유머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고요. 할아버지 경비원분은 성경책을 경비실에 두고 다니시는가 하면, 어느 날은 눈만 올려 뜨면 보이는 벽시계 옆에 아리송한 성경 구절이 적혀있는 액자까지 걸어놓으신 분이셨지요. 그런데 전화 통화 후 그분이 정작 약한 생명체에겐 야박하게 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성경책이든 액자든 그것도 이제 늘그막에 천국은 가고 싶어서 하는 행동으로만 보였어요. 뭐,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스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할아버지 경비원분이 새벽에 달을 구경하신다는 건 왠지 운치 있게 느껴지더군요. 백발의 노인이 경비실에서 유리창 너머의 달을 한참 보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고요. 실제로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건 멋있을 것 같았어요.


 어쨌든 땅콩이가 용케 낮이든 밤이든, 제가 오는 날이 아니면 잘 숨어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죠. 똑똑한 고양이라 날짜의 개념을 이해했던 건지, 제가 하루 걸러 경비실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했고요. 제가 경비실을 나오면 바닥에서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고양이 경비원'이 출근했음을 알리고, 순찰 때는 마치 강아지처럼 절 졸졸 따라다녔어요. 그러면서 땅콩이도 중요한 본인의 업무를 한 가지 했어요. 사료공장에 사는 고양이들이 밤에 넘어오면 땅콩이가 먼저 감지했거든요. 순찰 중에 땅콩이가 넘어온 고양이를 찾아내고, 제가 뒤에 있다 웅장한 걸음으로 다가가 박수 한번 쳐주거나 소리 한번 질러주면, 어떤 고양이든 줄행랑이었죠. 우리의 호흡은 정말 완벽했어요. 땅콩이와 지내면서부터는 함께 산책하는 느낌도 들어서 순찰 시간마저 즐거웠고요. 언제나 순찰을 시작할 때, 땅콩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 땅콩아 가자!"


 어느 날 순찰 중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밤하늘에 별들이 정말 아름답게 걸려있었어요. 그래서 땅콩이에게 "땅콩아! 저기 봐 저기!"라고 말하면서 하늘을 가리키니 땅콩이도 따라 보던 게 떠오르는군요. 그 순간이 참 낭만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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