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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풍 Jun 20. 2022

안녕하세요? 행성 L이에요.

4. 새벽 괴성의 아저씨 

 여관은 밤에 절간처럼 조용한 편이었어요. 방값도 저렴하고 전 조용하게 지낼 수 있어서 굳이 돈을 더 들여 방을 옮기려고 하지 않았죠. 3년째 여관에서 생활하던 중, 제 바로 아래층에 새로운 장기방 투숙객이 들어오셨었죠. 어떻게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는지 알게 되었냐면,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씩 새벽에 괴성을 지르시더라고요. 전 그걸 엄청난 술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알코올 중독자 한분이 같은 층에 있어서 그분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 같은 층에 있는 분은 그래도 술을 드시고 조용히 방안에 계시는 편이셨어요. 복지단체 관계자인듯한 남자분이 가끔 오셔서 문을 막 두드려 불러내시곤, 그분에게 술 드셨는지 물어보곤 하셨어요. 그럼 그분은 반주로 딱 한잔 정도만 마신다는 둥 변명을 하셨죠.

 

 야간일을 하지만 저도 비번인 날에는 밤에 자는데 아래층 아저씨 때문에 몇 번 깨곤 했었어요. 물론 깰 때마다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죠. 그 아저씨가 괴성을 지르면서 하는 말은 거의 비슷했어요.


'애들은 어쩌라고! 애들은!'

'왜! 날더러 어쩌라고! 왜!'

 

 거의 이 두 가지의 말을 무한 반복하셨어요. 그래서 뭔가 안타까운 개인 사정이 있는 듯해서 '얼마나 속상하면 저럴까.'생각하고 계속 참아줬죠. 그런데 정말 피로해서 몸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날 새벽에 끝없이 또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화가 나서 창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어요.


"작작 좀 해요! 그만하라고!"

 

 정말 화가 났었어요. 여관에서는 장기방 사람들끼리 웬만하면 서로 불편한 게 있어도 참고 터치 안 하는 편이었어요. 그건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 서로 정체는 모르지만 돈이 없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다음날 낮에 빨래를 하러 1층에 내려가 세탁기를 사용하는데 마침 사장님이 나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장님께 아래층 사람 술주정이 너무 심해서 밤에 잠을 못 자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그 사람은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놀라서 제가 물어봤었죠.

 

"예! 분명 술주정이었는데요." 

"아니! 그 사람 정신이 조금 어떻게 됐어. 그래서 가족들이 여기 방 잡아 준 건데 나도 내 보낼까 생각은 하고 있어. 또 그럼 이야기해. 내보내야지 뭐."


 전 굉장히 놀랐었죠. 술도 안 먹은 상태에서 그렇게 한다면 정말 심한 마음의 병이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신기하게 그 아저씨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더라고요.

 

 며칠이 지나 사장님이 저녁에 제 방문을 두드리시면서 아래층에 티브이에 이상 있다고 잠깐 봐줄 수 있겠냐고 부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저씨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가 보게 되었어요. 긴 장발에 깡 마른 체구였고 산에서 수십 년 도 닦은 도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남다른 모습이었어요. 물론 굉장히 지저분했어요. 방안에는 신기하게 통마늘들이 쫙 걸려있었는데 뭔가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어 보였어요. 새벽에 괴성을 질러대는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절이 바르시더군요. 낮고 굵은 저음에 티브이 이상 있는 거 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사장님과 대화하면서 젊은 사람이 이렇게 도와주니 고맙다고도 하셨어요. 원래는 착한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티브이가 완전히 고장 나서 여관에 남은 다른 티브이를 사장님께 받아 교체해드리고 왔는데 '그냥 소리 질러도 참아주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 아저씨의 사연은 정확히 모르지만 인생의 많은 걸 상실한 듯했거든요.


 그분이 딱해서 그랬는지 사장님은 다른 방에 사시는 할아버지께 복지단체에서 주는 배달 도시락을 받는 법을 알아보고, 그 괴성의 아저씨도 도시락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어요. 도시락을 받는 동안 그 괴성의 아저씨의 행동이 인상적이었는데 문 앞에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메모를 붙여놓고 문고리에 빈 도시락 통을 걸어놓으시더라고요.  


 몇 달 뒤에 그 아저씨는 방을 결국 빼셨는데, 같은 층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민원이 계속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나가신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 아저씨는 직접 본 뒤로는 그냥 참고 지냈고요.


 인간의 마음이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전 그 아저씨의 새벽 괴성에 화가 폭발한 상태였을 때, 진짜 그 아저씨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생겼거든요. 층간소음으로 인한 원수의 탄생과 비슷했죠. 그런데 직접 그 아저씨를 보고 이 사람이 정말 딱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적대감과 분노가 사그라졌던 경험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막연하게 혼자서 정체불명의 타인에 대한 분노를 키우기보단, 사실 확인이나 사연이라도 한번 알아보는 게 서로의 평화를 위해 좋을 때도 있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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