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풍 Jul 07. 2022

안녕하세요? 행성 L이에요.

6. 여관방 냉장고

 여관에 오기 전 지내던 고시원의 냉장고는 공용이었어요. 워낙 방값이 싼 곳이라 방안에 티브이를 제외하곤 모든 게 공용시설이었죠. 2대의 냉장고 중 한대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주로 보이는 음료 냉장고였는데 어디선가 주워 온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나머지 한대도 역시 냉장 정육코너에서나 볼 수 있는 모양이었는데 거기엔 주로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김치를 담은 김치통이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었죠. 사람들은 라벨 스티커에 방 번호를 적어 반찬통에 붙여놓고 보관했어요. 시설이 좋은 원룸형 고시원은 방안에 샤워부스, 화장실, 냉장고, 에어컨도 있지만 그런 곳은 가격이 좀 높은 편이라 벌이가 시원찮으면 공용시설 쓰는 걸 감수해야 했죠. 그래서 여관 장기방을 처음 구경할 때 오래돼 보였지만 창문형 에어컨과 작은 음료 냉장고가 따로 있어서 가슴이 두근두근 할 정도로 좋았어요.

 

 여관에서 지내다 보면 방을 옮겨야 할 일이 1,2년에 한 번씩은 생겼어요. 주로 보수 공사 때문이었죠. 저는 물건에도 정을 붙이는 성격이라 맨 처음 살던 방에서 사용하던 냉장고에 애착이 가더라고요. 무려 30년이 넘은 냉장고였지만 훌륭하게 작동했거든요.

 

 자동으로 성애를 제거하는 기능은 없어서 두 달에 한번 정도는 냉장고의 물건을 다 빼고 성애 제거를 해야 했어요. 정말 하루 날 잡아서 제거를 했었죠. 성애 제거를 하지 않으면 약간의 살얼음 기능이 있는 칸이 성애로 인해 좁아지는 데다 냉장고 소리도 커지는 것 같더라고요.

 냉장고의 전원을 끄고 성애가 녹아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손으로 뜯어내면 툭툭 떨어졌죠. 귀찮은 작업이긴 했지만 하고 나면 속이 다 시원했어요.

 성애를 다 제거하고 다시 식량을 채워놓으면, 한 시간 정도의 작업이 완벽히 끝났어요. 다른 방으로 옮겼을 때, 좀 더 최신형의 비슷한 냉장고가 있었지만 전 처음 사용했던 저 냉장고가 더 그립더라고요. 냉장고 치고는 정말 고대 유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 잘 동작해 주어서요.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하는데 저 냉장고 안에 담긴 영혼의 의지가 저보다 강했던 것 같아요. 오랜 세월 같은 일을 꾸준히 하는 것도 존중받을 자격이 다고 보거든요. 전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고요. 그래서 저 냉장고를 좋아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작가의 이전글 안녕하세요? 행성 L이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