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은 일광전구에 특별한 날로 기억됩니다.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지 135년, 국내에 수입된지 127만에 퇴출이 결정된 날이었거든요. 같은 해에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백열천구의 퇴출이 의결되었습니다. 우리 정부 역시 가정용 백열 전구의 생산과 수입을 전면 중단키로 했죠.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백열전구가 지극히 비효율적인 조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력 사용량 중 고작 5%만 빛을 내는데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열 에너지로 발산된다고 하네요.
1970년대만 해도 국내에는 30여 개 업체가 백열전구를 만들며 짭짤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형광등이 보급되면서 15개 안팎으로 줄었어요. 1990년대 말에는 GE, 오스람, 필립스 등 수입 제품이 인기를 모으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대부분의 회사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번개표’ 브랜드로 유명한 금호전기, 남영전구 등 경쟁사는 모두 백열전구사업을 접었습니다.
대구에 있는 일광전구는 1962년부터 백열전구를 생산했습니다. 가정용·산업용 백열전구를 만들어왔죠. 하지만 가정용 백열전구가 사라지며 갈림길에 섰습니다. 하지만 일광전구는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이 회사는 디자인이 더해진 장식용 전구를 생산하면서 국내 유일 백열전구 회사로 남았습니다. 2014년만 해도 약 100종의 전구를 하루 6만개 생산하던 이곳은 300종 넘는 전구를 하루에 1만5000개 생산하는 회사로 탈바꿈했습니다. 대부분 장식용이고 일부만 산업용 전구입니다. 과연 이러한 생존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일광전구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갔습니다. 1998년 가업을 이어받은 김홍도 일광전구 대표는 경쟁사가 백열전구 사업을 포기할 때 돌파구를 모색했습니다. “디자인을 입히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죠. 분기점이 된 것은 2013년입니다. 외부 디자이너로 협업하던 권순만 디자인팀장을 영입해 브랜드 총괄을 맡겼습니다. 권 팀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삼파장·크립톤 등 생산자 중심의 기술적 용어부터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소비자가 용도에 따라 전구를 고를 수 있도록 클래식·장식용·파티용 등으로 분류했습니다.
소비자 취향에 맞춰 상품 종류는 늘리고 생산량은 줄였습니다. 필라멘트를 여러 번 꼬거나 전구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깎는 등 파격적인 디자인의 제품도 선보였죠. 유물로 취급받던 백열전구를 빈티지 제품으로 탈바꿈시킨 것입니다. 원래 일광전구의 패키지 디자인을 의뢰받았다가 전구의 속성에 매력을 느껴 눌러앉은 그는 '백열전구의 빛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줘 조명인 동시에 장식용품으로 적격'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스테디셀러가 된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에 이어 최근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에서 모티브를 얻은 제품과 유리구를 막대처럼 길쭉하게 만든 제품 등을 개발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유니크한(독특한) 전구가 갖고 싶으면 일광을 찾으라’는 입소문이 났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 생산설비를 자동화한 것도 수익성 향상에 도움이 됐습니다. 회사는 백열전구를 경험해보지 못한 10~20대와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본사 내부에 전담 마케팅팀을 신설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10월 현재 일광전구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12,000명이 넘습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외부에서 협업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는 일광전구와 협업한 상품 라인 ‘아티산’을 출시했습니다. 일광전구는 2015년 국내 최대 규모 음악축제인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에 조명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일광전구는 야외무대의 관객석 주변을 장식용 전구로 꾸몄습니다. 백열전구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감상적인 인디 음악이 어우러져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난해 9월엔 아우디와 신차 공개 행사에서 협업하기도 했습니다.
일광전구는 디자인을 활용한 리브랜딩의 교과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진어묵, 덕화명란 등의 변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들은 해당 산업의 도태라는 거대한 물결을 디자인에 기반한 브랜딩으로 슬기롭게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의 뒤에는 '레트로'라는 트렌드에 반응한 MZ 세대들의 뜨거운 호응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드하다고 다 나쁘지 않아요. 누군가에겐 새롭고 힙할 수 있습니다. 밀가루 브랜드 곰표의 성공, 전통주의 화려한 변신을 알린 원소주의 등장에는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트렌드의 물결에 올라탄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오래된 역사는 그 자체로 자산입니다. 인천에 있는 조양방직은 낡은 방직공장을 힙한 카페로 변신시켰습니다. 프릳츠 커피는 일부러 7,80년대의 폰트로 쓰여진 광고 카피로 MZ세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으로 거의 모든 자산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헤리티지(Heritage)는 로망입니다. 오래된 떡집도, 수십년 된 성냥도, 명맥만 유지하는 전통주는 디자인과 브랜딩으로 새옷을 갈아입고 사랑받는 시대입니다. 혹 여러분에게는 그런 자산이 없나요? 오래 되었다고 무조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 안에서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유니크함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광전구의 변신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