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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고양이 까망이를 부탁해!

우리 집엔 고양이 세 마리가 있다. 고양이로서의 품위와 애교를 동시에 가진 별이는 어느 천둥 치는 날 우리 집으로 왔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까지 우렁차게 울어대는 통에 아내와 딸리 부득불? 데려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치즈빛 고운 털을 가진 별이는 한 마디로 미묘이다. 새끼때부터 지금까지 그 미모를 잃은 적이 없다. 사람을 좋아해서 TV를 보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노라면 가랑이 사이로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고 손을 핥는다. 그윽한 눈빛은 마치 최면제처럼 사람을 홀리는 묘미가 있다.


그 다음으로 뚱이가 있다. 어느 주말 아침 온 동네가 떠들석하게 울어대는 통에 나도 모르게 집으로 데려온  케이스다. 길바닥 한 가운데서 애처롭게 울어대는데 나도 모르게 데려왔다. 가끔은 그냥 두고봤어야 하지 않나 조심스러운 대목이다. 아무튼 유달리 긴 몸에 활동력 왕성한 이 녀석은 심술나 보이는 눈썹이 매력 포인트다. 장난감을 주면 가장 잘 가지고 논다. 별이만큼 살갑지는 않지만 잠을 잘 때면 언제나 다리 밑 이불에 기대 꾹꾹이를 한다. 뭔가 사고는 가장 잘 치는데 미워할 수가 없는 매력을 가졌다. 털빛은 고등어 스타일인데 꼬리끝이 살짝 휘어 잡는 맛이 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까망이다. 이 녀석은 유일하게 우리 집에서 태어난 고양이다. 지금은 집을 나간 루이(봉구)와 바이러스로 고양이별로 돌아간 라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단 까만 털을 가진 이 고양이는 다른 집으로 입양이 어려웠다. 그래서 식구가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배변을 못 가린다. 다른 고양이들에게 밀려서 모래가 아닌 소파 뒤에 볼 일을 본다. 이걸 치우는게 보통 귀찮은게 아니다. 게다가 구내염이 있어 냄새가 난다(몇 번 약을 썼는데 신통치 않다). 하루에도 몇 번은 집을 나가겠다고 문을 긁어댄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에게 미운 털이 박힌 통에 나를 보면 슬슬 피한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다. 고양히 세 마리도 내가 이렇게 차별 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한 거겠지만 세 마리는 울음 소리도 다르다. 그런데 다른 두 마리의 울음 소리는 정겨운데 까망이는 일단 짜증이 난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딱히 대단할게 없다. 물론 패드를 깔아놓아도 줄줄이 맛동산을 진열해놓는다는 점, 수시로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어야 한다는 점, 이른 아침부터 나가겠다고 울어댄다는 점, 까칠하고 윤기 없는 까만색 털과 심한 입냄새... 따지고 보면 타고 났거나 내가 케어를 못한 탓이거나 성격 탓인데 이렇게 차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게 된다. 인간의 선입견과 편견이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서...


집에서 이렇게 내게 구박을 받는 까망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나간다. 집이 1층이라 베란다 문만 열어두면 쉽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녀석이 밖에서 새끼 고양이 친구를 만든 모양이다. 희고 검은 털이 반반인 이 녀석이 언제부터인가 까망이를 따라 베란다 바로 앞까지 와서 울어대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먹이를 던져 주었고 이제는 이 녀석이 집 안으로 들어와 먹이까지 먹고 간다. 온 몸에 때가 꾀죄죄한 녀석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다. 순간의 동정심으로 고양이를 들이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요즘같이 쌀쌀할 날씨에... 라는 마음으로 내치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한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문 밖을 내다볼 때가 있다. 밥은 먹고 댕기나 싶어서 말이다.



하물며 동물을 대하기도 이리 힘든데 사람일까 싶다. 때로 대화를 하다 보면 세상을 2분법으로 나눠 바라보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정치만 해도 그렇다. 잘잘못이 아닌 진영 논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면 숨이 컥컥 막힌다. 더 배우고 덜 배우고의 차이도 없다. 누가 봐도 잘못한 일인데 무턱대고 감싸거나, 저 정도면 괜찮다 싶은데 이 잡듯이 욕하는 사람을 본다. 이런 정치의 논리로 빚어진 세계사의 비극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본다는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나라고 별 수 없었다. 고양이 세 마리도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기가 이렇게 어려우니 말이다.


까망이를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제대로 된 구내염 치료를 시켜줘야겠다. 소파위에 올려진 내 옷을 깔아뭉개고 잔다고 구박하지 말아야겠다. 오죽 외로웠으면 밖에서 친구를 찾았을까 싶어 짠한 마음이 든다. 좀 더 자주 저 녀석의 화장실?을 치워줘야겠다. 편견없이 때로는 간식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어야겠다. 내 주위의 사람들도 편견없이 바라보기 위해 애써야겠다. 뭐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어야겠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싶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겠다. 까망이는 지금도 내 소파 위에서 내 옷을 깔고 잠들어 있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나도 모르게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까망이의 친구는 지난 밤을 무사히 보낸 것일까? 이렇게 오늘도 집사의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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