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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집 – 토종콩으로 빈라떼를 만드는 사람들

충남 공주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도심이고 하나는 원도심, 즉 원래의 공주였던 제민천이란 마을입니다. 사방 20분이면 끝에 가닿는 이 조그만 동네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만나는 지방의 소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1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죠. 무엇보다 동네가 한없이 고즈넉합니다. 고도 제한 때문에 집들의 지붕이 한 뼘 정도는 낮아보여요. 마치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에 들른 듯 색다른 정취가 있죠. 그리고 이곳에선 아주 특이한 카페 하나를 만날 수 있어요. 바로 '곡물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토종 곡물로 만든 식음료를 파는 곳이에요.


이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는 빈라떼입니다. 빈라떼는 토종콩을 100% 갈아넣은 일종의 미숫가루입니다. 선비잡이콩, 배틀콩, 아주까리밤콩, 대추밤콩 등을 사용해서 만들어지죠. 각각의 맛을 취향에 따라 골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곡물집 만의 특별함 중 하나입니다. 물론 콩과 커피를 블렌딩한 시그니처 커피도 있어요. 토종콩인 등틔기콩에 콜롬비아 나리노 수프레모와 에티오피아 사다모를 블렌딩했죠. 고소한 뒷맛이 한 마디로 일품입니다. 여기에 한라산쑥, 토종 황 녹두, 자주미, 토종 쥐눈이콩, 토종 흰 들깨를 쓴 찹쌀 구운떡와플을 함께 주문한다면, 든든한 한 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콩으로 만든 빈 라떼를 마시다


곡물집은 제민천 마을 중에서도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어요. 한옥으로 만든 고즈넉한 게스트 하우스 '봉황재'를 돌아 골목길을 올라가면, 역시 한옥을 개조한 곡물집을 만날 수 있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형형색색으로 앙증맞게 포장된 상품들을 만날 수 있어요. 모두 토종 콩이나 벼, 곡물들로 만들어진 제품들이죠. 200에서 500g씩 예쁘게 소포장해서 판매되는데, 아주까리밤콩, 베틀콩, 까막벼 등 낯설지만 재미있는 이름을 하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 중 선비잡이콩, 알밤콩 등 다섯 가지 콩은 미숫가루로 제품화해서 판매하고 있는 중이죠.


오후의 늦은 햇볕이 들이치는 매장에서 선비잡이콩으로 만든 빈 라떼를 마셨습니다. 어릴 때 마셨던 미숫가루보다 덜 달고 더 고소하더군요. 아주 잘게 블렌딩 곡물의 식감이 새로웠습니다. 어차피 커피도 콩이 아니었던가요. 굳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마셨던 생각들에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이 가게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이어졌어요. 살짝 검색해보니 이 가게의 주인은 네이버 계열사인 라인프렌즈에서 브랜드 제품 기획자로 일하셨더군요. 남편분은 농업 디자인 프로젝트 회사인 쌈지농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고 하시네요.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곡물집을 보다 보니 문득 일본의 쌀집 브랜드 '아코메야'가 떠올랐습니다. 이곳은 일본 각지의 쌀을 엄선해 원하는 대로 정미해서 판매하는 본격적인 쌀집 브랜드입니다. 쌀이 주연이 되는 밥상을 위한 식재료를 비롯해 식도락을 위한 그릇과 액세서리, 욕실용품까지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는 라이프스타일 숍이기도 하죠. 이곳에서는 일본 각지에서 생산하는 여러 품종 가운데 엄선한 쌀을 현미부터 백미에 이르는 5단계 도정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5종, 7종, 10종의 쌀을 작은 사이즈로 포장한 샘플러 패키지를 테스트해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쌀을 고를 수도 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쌀 구매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된장이나 간장, 소금 같은 식품부터 야채와 생선 절임까지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런 식재료로 요리하는 데 필요한 조리 도구와 우아한 상차림을 위한 장인이 만든 식기도 함께 판매하고 있죠. 식사 후 차를 내는 다기에 이르기까지 맛 좋고 멋 좋은 한 끼를 위한 모든 것을 한곳에서 구매할 수 있는 원스톱 쇼핑의 공간인 셈이에요. 일본의 유명 상품인 이마바리 타월을 비롯해 욕실용품까지 구비한 아코메야가 취급하는 상품은 무려 6,000여 가지에 달합니다.


오래된 것들, 익숙한 것들의 가능성


그러면 이쯤해서 발상의 전환을 한 번 해보자구요. 2020년의 대한민국에는 너무도 많은 카페가 있습니다. 공주만 해도 무려 1,300여 명의 카페 사장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방의 소도시가 이 정도니 서울과 수도권은 더 말할 것도 없을테고요. 하지만 카페에서 커피가 아닌 토종 곡물로 만든 미숫가루를 판다면, 가게의 위치가 도심의 한복판이 아닌 공주의 원도심이라면,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토종 곡물의 생김새를 살펴보고, 맛을 보고, 식감을 느끼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매우 많은 얘기들이 나와요. 어떤 분은 곡물이 불러오는 옛 추억과 기억에 집중하셨고, 어느 분은 콩마다 식감과 목 넘김이 다른 부분을 흥미로워하셨어요."


사실 브랜딩의 기본은 다름아닌 차별화입니다. 한 마디로 남다름이죠. 그러나 그것이 항상 새로운 것일 필요는 없습니. 오히려 지금의 새로운 세대들은 오래된 것들, 기본이 되는 것들에서 매력을 찾고 있어요. 저같은 중년에겐 추억의 음식인 미숫가루가 이들에겐 오히려 빈 라떼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메뉴로 인식되는 세상이에요. 그러니 생각의 지평을 넓혀보자고요. 오래된 것들, 익숙한 것들에서 가능성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곡물집에 이토록 열광하는 요즘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무엇에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꿈틀거림이 있는 사람이라면 곡물집을 찾아보세요. 아주 소중한 오후의 한 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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