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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욕망의 숨은 민낯을 마주하다, 재벌집 막내아들

1. 밤 11시에 무심코 넷플릭스를 틀었다가 새벽 5시까지 정주행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에요. 송중기를 좋아하지도 않고, 타임슬립물의 요소가 너무 진부하게 여겨져서 몰입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재벌가 고명딸 진화영의 연기를 보면서 무슨 신내림을 받은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감동하며 깊이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진양철 회장의 연기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악마의 탈을 쓴 진성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마음이 가는 모현민도 볼 때마다 흐뭇한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솔직히 서 검사보다 모현민이랑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드라마적으로는)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구요.


2. 이 드라마는 결국 인간의 욕심, 그리고 본능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드라마 중간까지는 저도 재벌 욕을 많이 했습니다. 막말하는 대한항공 딸들 이야기, 쇠파이프를 든 한화 회장 이야기, 형제의 난으로 불리는 경영권 전쟁은 또 어디 한 두번이었던가요. 게다가 지금도 재벌 3세들은 미국 영주권을 쥔 채 끼리끼리 모인다는 걸 이대 나온 후배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될 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재벌가의 일원이면 달랐을까?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000명 정도 모이는 커뮤니타 하나를 운영해도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바로 저였어요. 어느 순간 그 모임이 '내꺼'라는 생각, 욕심이 들었었으니까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미워하기도 했었답니다. 이거 얼마나 우습고 무서운 일인가요.


3. 진 회장은 자신에게 욕심, 의심, 변심이라는 세 개의 심보가 있다고 손주에게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꼭 닮은 손주에게서 묘한 동질감과 연대감,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순양 그룹을 혼외 자식의 아들에게 주려고 하는 거겠죠? 이전에 함께 일했던 회사 대표도 똑같은 말을 하곤 했습니다. 회사 안 누구도 믿지 않는다구요. 그러면서 제게는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사람이라며 이런 저런 선물을 주시곤 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경영이고, 그게 사람 다루는 법이었습니다. 내가 회사를 운영한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걸요. 내가 만든 커뮤니티도 아닌데, 일단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맨날 광고만 하는 사람이 그렇게 밉고 싫더라구요.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제 사람됨의 그릇을 확인하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드라마 속 재벌을 욕할 이유가 적어도 제게는 전혀 없는 거였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재벌가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종종 '속이 너무 보인다'는 얘기를 주변으로부터 듣는 사람이거든요. 와이프도 그러고 함께 일한 부하 직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조직 생활이 어려웠고 회사에서 늘 루저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오히려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마피아 게임을 해도 가장 먼저 들키는 사람인 제가, 오히려 그 백치미 같은 솔직함?으로 5년 이상 혼자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사람마다 어울리는 자리가 있고 자기다운 삶이 있습니다. 주인공 진도준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인 셈이죠. 그 사람의 삶이 옳다는게 아니라 그냥 나답게 사는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그런 드라마였습니다.


5. 타임슬립물에 주인공을 누가 죽였는지 계속 궁금하게 하는 스릴러적인 요소가 잘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역사를 주요한 사건으로 잘게 배치한 것 역시 너무 칭찬하고 싶은 드라마네요. 그래서 외국인들은 좀 어려워하나 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본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을 드라마의 뼈대로 삼고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11화까지 보고 나니 대충 범인이 짐작이 가서 살짝 김은 빠집니다. 그 와중에 2시간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는 진양철 회장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오직 순양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게 어디 저뿐일까요.


6.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재벌가의 많은 사람들이 용한 점쟁이들을 데리고 다닙니다. 이전에 일하던 회사가 인수될 뻔 했을 때 그 회사 대표가 데리고 온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요. 지금의 대통령과 그 부인에 관한 논의는 일단 예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조차 이런 일들을 일견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건 참 이해기도 어렵고 견디기도 어렵습니다. 아예 성경을 보지도 말고 설교를 하지도 말던가요. 사실 다 같은 거에요. 자신의 욕망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고 눈이 멀게 되는걸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어디 재벌만 그렇던가요. 드라마 속 검사들도 그랬고, 신문들도 그랬고, 하다못해 재벌 옆의 아주 똑똑한 인재들도 다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고명딸 진화영의 구두를 신겨주던 상무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자신의 노후를 위해 기꺼이 감옥도 대신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 동안 또 얼마나 많았을지요. 그래서 함부로 정의와 옮음을 이야기하기가 힘든 겁니다.



7.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라고 자신있게 얘기하긴 어렵습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성장에 얽힌 어두운 면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온 나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단지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난 너희와 달라'라고 확신에 찬 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특별히 악하거나 무능한 것도 아닐 거에요. 하지만 역사의 쳇바퀴는 엄격해서 그런 작은 악들이 나비효과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비극을 만들어내죠. 공간을 넓히겠다고 기둥까지 깍아내서 무너진 삼풍 백화점을 기억하시나요? 세월호나 10.29 이태원의 비극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참 어리석은 겁니다. 그 일은 언제든지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을테니까요.


8. 오해는 마세요. 정권만 바뀌었다 뿐이지 이런 비극은 언제든 계속되어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 빗대어 이런 묵직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당연함에 맞설 수 있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있기에 어쩌면 이 세상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추며 지속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순양이 아무리 큰 회사라 한들 집안 사람들끼리 하는 구멍가게랑 다를게 있을까요. 그럼에도 세상에는 좀 더 큰 대의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규모가 아무리 작다 해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림자가 깊다는 건 그 뒤에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정직하게 사는 일로 재벌이 아닌 소시민의 삶을 영위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아주 가끔 드라마로 흥분하게 되는 제 심정을 이해해주십시요. 아무리 그래봐야 드라마잖아요. 보이지 않는 어둠에 분노하기 보다 내 앞의 작은 빛을 따라 살아보겠습니다.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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