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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당근 매너 온도는 몇 도인가요?

핸드폰에 담긴 음악의 플레이리스트만 봐도 그 사람에 대해 대충 알 수 있다는 다큐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이라면 유튜브 시청기록을 보는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여행, 밀리터리, IT 관련 채널들을 많이 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보는 건 핸드폰이나 노트을 언박싱하는 채널들입니다. 잇섭, 언더케이지, 고나고, 가전주부 등을 자주 봅니다. 아마도 매번 살 수는 없으니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실제로도 제품들을 많이 사는 편입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필요해서가 아니라 갖고 싶어서 말이죠.


그런데 변덕도 심합니다. 아이폰도 한 1년 쓰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갤럭시로 갈아탔다가 다시 넘어오곤 합니다. 그때 가장 많이 들락거리는 곳이 중고나라나 당근 같은 곳이에요. 전자기기는 의외로 중고 중에 좋은 물건이 많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에요. 산 지 얼마되지 않거나 얼마 쓰지 않고 기계를 바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상태도 좋을 수밖에 없어요. 때로는 포장을 뜯기도 전에 변심을 해서 내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언박싱만 한 경우는 더 많을 겁니다. 문제는 이 당근 거래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거에요.


어제만 해도 그랬습니다. 나의 소중한 아이폰 13 프로를 내놨더니 당장 오겠다는 사람이 있더군요. 문제는 약속 시간 30분 전에 저를 차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되네요. 안 사면 안 사지 왜 차단을 했을까요? 그런데 이 정도는 양반입니다. 다짜고짜 반말로 물어보는 사람, 하루 종일 질문만 하다가 안 사는 사람, 약속하고 잠수 타는 사람, 다짜고짜 물건값을 깎고 보는 사람, 기껏 나갔더니 차에서 내리지 않고 물건만 쓱 보고 던지듯이 넘기고는 떠나는 사람... 마치 구걸하는 사람이 된 듯 넋 나간 모습으로 그 차를 바라보던 기억이 선하네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살 사람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살 사람은 아주 기본적인 사실만 확인하고 바로 구매합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는 사람치고 구매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일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저와 일할 사람들은 계약서부터 쓰자고 합니다. 선금도 빠릅니다. 원하는 것도 명쾌합니다. 그런데 말이 많고 조건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일의 성사 가능성이 낮습니다. 설사 일을 해도 안좋게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브랜딩이 뭔지도 모르고 덜컥 일부터 하자고 한 후에 카탈로그 홍보 문구부터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을 이야기하며 비용을 깎으려는 사람과는 아예 일을 하지 않는 원칙도 세웠습니다. 이런 분들일수록 오히려 요구사항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가지는 절실함이에요. 당근이든 프로젝트든 그 절실함의 차이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사람들일수록 결정도 빠릅니다. 왜냐하면 온갖 자료 서치를 통해 그 제품과 프로젝트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고 거래에서 가장 황당한 경우는 구매 가격을 묻는 겁니다.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모르고 거래부터 하려 드니 좋게 끝나기가 힘든 것이죠.


당근에는 거래를 통해 얻은 신뢰를 점수화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저의 매너 온도는 40.9도입니다. 재거래 희망률은 100퍼센트네요. 이게 좋은게 아닙니다. 멀쩡한 제품들을 중고라는 이유도 싸게 넘긴 경우가 태반이니까요. 하지만 점점 더 거래가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근거지'들이 너무 많아요. 예전에는 중고나라보다는 더 낫지 않았나 싶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웬만하면 그 제품을 끝까지 쓰는게 남는거란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제가 당근을 끊을 수 있을까요? 그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요즘은 전자 잉크 노트에 빠져서 '리마커블2'를 검색하고 다닙니다. 구하기도 힘든데 가격은 또 왜 이리 비싼지... 방금 전엔 오래된 서피스 프로 6를 팔고 왔습니다. 간만에 쿨한 거래입니다. 아직도 사고 팔게 많은데 당근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네요. 혹 여러분의 당근 생활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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