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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를 좋아합니다

김애란 작가를 좋아합니다. 스티븐 킹의 서늘한 분위기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크한 문체를 동경하지만, 우리 글을 쓰는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공감과 울림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영어와 일본어를 한글만큼 쓸 수 있다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요.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그동안 다양한 글쓰기를 배우고 익혔습니다. 특히 짧고 건조한 글쓰기에 공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진짜 내 목소리를 글을 쓰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힘을 빼고 독백하듯이, 마치 김애란 작가가 쓴 소설을 읽듯이 말입니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유튜브에선 종종 실시간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온몸으로 감탄을 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거짓말 같습니다. 사람이 더 사람 같고, 자연은 더 자연 같습니다. 축구도 비슷합니다.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저렇게 공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손흥민의 감아차기는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그러면서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느 날 쉽게 휘갈겨 쓴 글 한 편에 누군가는 나와 같은 감탄을 내뱉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주는 아니고요, 아주 가끔씩 그렇습니다.


딸에게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선물했습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딸이 애벌레가 아닌 나비의 삶을 살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딸이 진지하게 저에게 고백을 해오더군요. 도저히 책을 다 읽지 못하겠다고. 뭔 일인가 싶어서 이유를 물어보니 애벌레 때문이랍니다. 처음에 한 두 마리 나올 때는 견딜만 했는데, 갈수록 떼로 몰려나오는 애벌레가 징그러워 책을 못 읽겠다고 하네요. 헛웃음이 났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저도 환공포증이 있어서 깨알같이 원이 박힌 그림은 도저히 못보는 사람이거든요. 이렇듯 사람은 각자 다르게 감탄하고, 또 다르게 절망합니다. 이 다름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느냐에 따라, 감히 그 사람의 성숙함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인보다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들이 있어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는 그 차이의 낙폭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남들이 그렇게 쉽게 하는 일들을 나는 왜 이렇게 견디기 힘든가 절망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저 타인과 다를 뿐 나의 무능과 무지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더불어 타인의 가능성을 더 높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공을 잘 차는 사람에게 감탄합니다. 수다를 잘 떠는 누군가, 운전을 잘하는 누군가, 맛집을 기막히게 찾아다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내게 없는 다름을 깨닫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손흥민이 감아차기를 하는 것처럼 한 문장의 글을 뽑아내는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내려가는게 수다를 떠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첫째는 그렇게 기타를 배웠고 둘째는 그렇게 그림과 노래하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게 돈이 되고 말고는 그 다음의 일인 것 같아요. 나의 남다름에 눈을 뜬 사람이 비로소 타인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어요. 글쓰기의 세계는 넓고 광활합니다. 저는 결코 김애란과 같은 소설을 쓸 수 없을 거에요. 그러나 이것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희망의 씨앗이 됩니다. 나는 김애란이 아니고, 스티븐 킹이 아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장 나다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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