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교와 경쟁에 익숙한 사람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앞에서,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빠르게 걷게 된다. 그 사람보다 더 앞에 서기 위해서다. 한 번은 지하철에 무심코 앉았다가 덩치 큰 청년과 어깨 싸움을 한 적도 있었다. 고작 1,2센티미터 정도의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한없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결국 그 싸움에 이겨 상대방이 먼저 자리를 떴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혼자 있기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그러니까 경쟁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비교나 경쟁이 꼭 본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절반 이상이 학습의 결과다. 항상 순위를 매기고 1등을 가리는 세상을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중학교 시절, 항상 시험 성적을 교실 뒤에 붙여놓았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2등이 될까봐 두려워서 공부했지만, 가장 마지막 칸을 채웠을 꼴찌의 마음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 꼴찌가 천성이 낙천적이라 별로 개의치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람인 이상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직장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니 생계와 직급과 월급이 달려 있으니 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브랜드 전문지 에디터로 일했던 나는 아이템 기획 회의 때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더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기사화하기 위해서, 나이 어린 동료들과 치열하게 비판하고 경쟁해야 했다. 기사를 쓰고 난 뒤 이어지는 피드백 미팅은 그야말로 사생결단, 비교와 경쟁의 끝판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지만 그때는 절박했다. 내 아이템을, 내 글에 대한 비판을 나에 대한 비난으로 오해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게 전부인줄로만 알았다.
경쟁은 효과적이다. 특히나 리더 입장에서는 손쉬운 인재 활용법이다. 내가 아는 회사 대표는 직원들을 하나 하나 따로 태워 영혼의 동반자라며 치켜 세우곤 했다. 회사를 떠나고 나서야 그런 말을 모두에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모두가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더 정확히는 성과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경영한 회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 두 해는 바짝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곧 번 아웃이 왔고 그때마다 회사는 새로운 인력을 보충하는 것으로 그 빈 자리를 대신하려 했다. 자연스럽게 결과물의 콸러티는 떨어지고 이는 곧 회사 매출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회사는 10년을 견디지 못하고 큰 회사에 팔리고 말았다.
경쟁이 아닌 협업의 유익을 경험한 것은 회사로부터 독립한 이후의 일이었다. 옆에서 달리는 누군가가 없으니 오히려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리 큰 회사의 리더라도 내겐 같은 대표일 뿐이었다. 직함과 성과를 비교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결과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울러 협업은 오히려 쉬워졌다. 혼자 일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누군가와 '함께' 일해야 할 필요성을 새삼 깨닫게 됐다. 조금 부족해도, 불만이 있어도 참고 기다리는 연습을 하게 됐다. 그 사람은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물론 어떤 면에서 비교나 경쟁은 본능에 가깝다. 우리는 누구나 남보다 앞에 서고 싶어하고 칭찬받고 싶어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그건 곧 생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십 수년간 이어지는 학교 생활을 계속하다보면 이런 비교 의식은 고착화된다. 어차피 학교란 산업 사회에서 안정된 인력을 공급받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제도 아니었던가. 그 사람의 고유한 기질과 특성, 능력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는게 학교다. 왜냐하면 그건 측정하고 비교하고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데 익숙해진다.
문제는 이것이 한 개인의 자존감과 직결되는 문제라는데 있다. 단 한 명의 1등을 만들기 위해 99명은 자연스럽게 루저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2등은 꼴찌보다 더 불행한 존재다. 동메달을 딴 선수가 은메달을 딴 선수보다 행복한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런데 이건 한 인간의 개성과 고유한 장점을 말살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영화 아바타 2에선 숲의 종족이 물의 종족의 거주지로 옮겨가 겪는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를 잘 타는 아이가 날 때부터 수영을 해온 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 하나의 조건, 즉 암기력과 성실함만을 잣대로 아이들을 줄 세운다.
하다못해 마피아 게임을 해도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는 회사 생활 내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경쟁이란 때로 철저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숨겨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곤 하기 때문이다. 회사 내의 정치력은 한 개인의 업무 역량 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주 철저하게 무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 밖으로 나오니 그 점이 오히려 '진정성'이란 장점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다고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 그런 믿음이 더 많은 사람과 일과 기회로 이어졌다. 나의 단점이 오히려 장점이 되는 놀라운 경험들이었다.
비교나 경쟁이 무의미하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한 개인의 온전함이라는 대전제에 기반을 둔 것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원래 숲에서 나무를 타던 사람이란 걸 알면 헤엄을 배우면서 낙망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못한다는게 어떻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있겠는가. 학습의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더 섬세하고 예민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그런 점을 알게 되면 비로 성적은 낮더라도 자신의 고유함을 무기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능력을 자존감이라고 부른다.
최근 첫째에 이어 둘째도 학교를 자퇴했다. 첫째는 중학교를 자퇴한 후 계원예고에 합격했다. 기타를 좋아하는 이 친구는 지금 실용음학과 진학을 위해 열심히 재수 생활 중이다. 둘째는 고등학교를 반 학기 다니더니 더 이상 학교를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워낙 친구가 많고 사교성이 좋았던 아이라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의 속도가 느리고 상대방의 감정에 민감한 둘째는 중학교와 다른 고등학교 생활을 힘들어했다. 지금 둘째인 딸은 학교를 자퇴한 후 미술과 보컬 학원에 다니고 있다. 부모 된 입장에서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딸의 행복이다. 아주 소수의 성공을 위해 줄을 세우고 루저를 만드는 학교에 반드시 다닐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회사를 나와 오히려 더 많은 수입과 행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함과 온전함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러한 노력이 성과와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내 삶으로 증명해보이고 싶다. 내가 지금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는 회사 '브랜드워커'는 그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이다. 네 사람의 파트너가 저마다의 고유한 경쟁력을 가지고 협업을 연습하고 있다. 때로는 따로, 때로는 또 같이 일하며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며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회사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타인의 뛰어난 결과를 보며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으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타인과 다른 나만의 고유함과 역량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타인의 성공이 곧 나의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부족한게 많은 사람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글과 말로 표현하는게 어렵지 않다.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이지만 일과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게 오히려 더 편한 사람이다. 더디지만 성과를 낸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렵지 않다. 다방면에 걸쳐 호기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에 열려 있는 편이다. 나는 지난 5년 간 홀로 일하며 이런 나의 장점을 수익과 성과로 실현하는데 성공해왔다. 나는 이런 나를 '브랜드워커'라 부른다. 자신의 차별화된 고유함을 가지고 나답게, 하나의 브랜드로 일하는 사람, 새해엔 이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내가 오늘 일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