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작가를 좋아합니다. 이 작가를 좋아하는 100가지의 이유를 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단 하나를 고르라면 '솔직함'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어요. 바로 수업 중에 자신의 체모가 스타킹에 떨어진 장면을 그린 소설입니다. 맞습니다. 그냥 체모가 아니라 바로 그곳의 체모가 떨어진거에요.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체모를 누군가 볼까 싶어 안절부절합니다. 저는 분명 이 장면이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것도, 묘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그걸 글로 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것도 소설이란 이름으로 대중에 읽힐 글을 말이죠.
저는 저의 첫 책에 내 생에 있어 가장 부끄러운 장면을 가감없이 썼습니다. 자신이 뽑은 팀원에게 팀장 자리를 물려주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어느 날 한 분이 이렇게 되묻더군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쓸 생각을 했냐고. 평생 박제될 흑역사를 무슨 생각으로 썼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글도, 영상도 찍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일견 일리 있는 말처럼 보였습니다. 적어도 세상에 나의 안좋은 모습은 감출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의 그런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의 삶은 부끄러운 일은 없겠지만 자랑스러운 일도 없겠다고 말이죠.
글쓰기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자기 검열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중 누구도 부끄럽고, 기억하기 싫은, 아프고 어두운 기억은 쓰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딱히 성공한 이야기도 없으니 글쓰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좋은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은 그 이야기를, 놀랍게도 독자들은 가장 좋아하거든요. 이야기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30억을 번 사람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러나 30억을 하루 아침에 날린 사람의 이야기는 어떠신가요? 어떤 이유로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지금 바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있습니다. 글쓰는 사람부터 궁금한 얘기거든요.
물론 이 이야기는 실패로 마무리되지 않아야 합니다. 놀라운 반전이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하지만 글의 도입부를 쓰기에는 실패의 이야기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서 가장 하기 싫은 부끄러운 기억이 있나요. 연애, 사업, 공부,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사람은 성공만 해온 사람의 이야기에요. 잘해봐야 자기 잘난 이야기밖에 더 될까요.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성공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런 이야기 하나 더 듣는다고 흥미로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실패한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살아오면서 어떤 실패를 했나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부끄러운 경험을 한 적은요. 저라면 그 얘기로 당신의 책 첫 장을 시작하겠습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강렬한 도입부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