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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아주 짧은 리뷰 몇 가지

1.


영화를 보고 순댓국을 먹었다. 동양도 서양도 그 어느쪽도 아닌 퓨전 음식을 먹은 듯 해서다. 뼛속까지 진한 한국인임을 영화관을 나오면서 깨달았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순댓국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좋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반대다.


2.


나는 이 영화를 어린 친구들이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인생의 큰 상처가 없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몇몇 평을 보니 지루했다고 한다. 아직 젊은 것이다. 혹은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굳이 전생과 인연을 끌어오면서까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만남과 헤어짐을 넘어선 그 너머의 이유를 찾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3.


영화 제목 '패스트 라이브즈'를 직역하면 '전생'이 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매우 한국적인 정서를 달리 옮길 말이 없었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몸의 대화를 나누는 서양인들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릴 때 이민을 온 여자 주인공의 그 복잡함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2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고 한다.


4.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 이민을 떠난 여자 주인공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 주인공이 뉴욕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거기까지다. 그들은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리지만 각자의 삶의 터전을 놓지 못한다. 그나마 서로를 이어주던 영상 통화까지 그만 하기로 한 둘은 각자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한다(여자 주인공만). 영화는 남자가 여자를 찾아온 2박 3일 간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전한다.


5.


둘은 끌리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마치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처럼 끌리지만 각자의 현실에 충실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나치게 똑똑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그 감정이 이미 '지나간 감정'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나방처럼 그 끌림에 뛰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한 이들이 이 감정에 충실해 실수?를 한다면 불륜이 된다. 그러나 그 미묘한 경계선에서 멈출 수 있다면, 혹은 숨길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비밀하게 터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6.


이 영화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시작부터 여주와 남주, 그리고 여주의 남편의 관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불 붙기 전의 뜨거운 여운만을 남긴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맺는다. 화면도 대사도 건조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관계의 무게를 아는 사람들에겐 형언할 수 없는 무게로 가슴 속에 내려앉는다.


7.


한 번은 와이프가 나에게 '관계 지능'이 낮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저 놈은 참 차가워'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또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다. 나는 관계의 무거움을 알기에 그것을 온전히 경험하고 표현하는 것이 두렵고도 무섭다. 나는 남자 주인공이 왜 여자 주인공을 만나고 싶어했는지 잘 안다. 그리고 왜 뉴욕으로 달려가지 않았는지도 안다. 그것은 허상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8.


그러나 그는 본능에 끌려 이미 가정을 이룬 여자 주인공에게로 도발과도 같은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확인한다. 자신의 감정도 진실한 것이며 그 허상도 진실한 것임을 깨닫는다. 만일 그 둘이 서로의 끌림을 인정하고 하룻밤을 보냈다면 어떠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소중하게 지켜온 그들의 끌림(비록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만)은 여타의 평범한 감정처럼 사그러져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9.


나는 한 번도 불교를 믿거나 그 종교에 끌림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왜 그들이 전생을 이야기하고 인연을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알것도 같다. 동양인은 언제나 캔버스를 가득 채우지 않고 빈곳을 만들어 두곤 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표현하기를 즐긴다. 글로벌한 시대를 산다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여주인공도 남자 주인공을 '뼈속까지 한국인'이라고 말하며 거리를 둔다. 어디서 태어났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떤 문화와 환경에서 자랐느냐가 될 테니까.


10.


여자 주인공의 집을 나와 우버로 택시를 잡은 그들 사이에는 정적이 흐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자 주인공은 강렬하게 여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이 인연에 대한 최고의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택시가 도착하고 남자는 떠난다. 그리고 여자는 터덜터덜 자신의 집으로 걸어간다. 그러다 마중 나온 남편에게 안겨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11.


나는 여전히 서양 사람들이, 조금은 다른 정서를 가진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이해할지 몹시도 의문이 든다. 그러나 누가 봐도 한국 중년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겐 한없이 뜨거운 영화였고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상을 받고 관심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안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고 소리 없이 울었던 내 마음을 알아줄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 영화평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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