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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기쁨 #03. - 남다르게 시작한 5개의 도입부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물리 선생님이 들어오더니 말없이 무거운 교탁을 밀어 교실 구석으로 옮기고 있었다. 아무리 성인이라지만 교탁의 무게도 만만치 않아 처음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윽고 교탁이 어느 시점부터 주르르 하고 밀려나는 모습을 우리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어번을 반복한 후 물리 선생님이 우리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 느끼는거 없니?"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누군가가 이렇게 답했다. 처음엔 교탁을 움직이기 힘들지만 계속 힘을 주면 어느 순간 쉬워집니다. 물리 선생님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런 걸 바로 '최대정지마찰력'이라고 부른다. 오늘 배운거 평생 잊지 마라. 그리고 나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만큼은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강렬한 예화?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쓰기에도 이와 비슷한 법칙이 자주 적용된다. 글은 언제나 첫 줄, 도입부를 쓰기가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다음과 같은 잘 쓴 도입부의 사례를 떠올리곤 한다.


1.


언젠가 워런 버핏과 가깝게 지내는 남자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편의상 그를 짐이라고 부르겠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다. 짐은 2009년 말 워런을 차에 태우고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때였고 오마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상점과 사업체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짐이 워런에게 물었다.


“암울하군요. 과연 경기가 회복될까요?”

그러자 워런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짐, 1962년에 가장 많이 팔린 초코바가 뭔지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스니커즈였어요. 그럼 현재 가장 많이 팔리는 초코바는 뭘까요?”

“모르겠습니다.”

“스니커즈예요.”


그리고 침묵,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모건 하우절이 쓴 '불변의 법칙' 도입부에 나오는 일화이다. 이 이야기 하나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찌르고 있다. 단순히 인사이트 넘치는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책의 주제와 맥이 닿아 있기 때문에 놀랍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왜 책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말 많은 서문만큼 식상하고 지루한 것도 없다. 이와 비슷한 강렬한 예화는 또 있다.


2.


1626년 인디언들은 이주민들에게 단돈 24달러에 오늘날 전 세계 금융계의 중심이 될 맨해튼을 팔았다. 흔히 역사 속 어리석은 결정으로 언급되는 이 사례를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투자자 존 템플턴은 다음과 같이 복리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24달러를 받은 인디언이 매년 8% 복리 수익률을 올렸다면 지금 맨해튼을 사고 로스앤젤레스를 두 번 사고도 돈이 남는다.”


'시골 의사의 부자 경제학' 35페이지에 나오는 예화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강렬한 메시지가 함께 더해진 것만큼 좋은 도입부도 없다. 마치 생각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듯, 추력을 잃은 로켓이 강렬한 지구의 중력에 끌려 낙하하듯이 우리를 책 속으로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그 속도는 더 가팔라진다. 바로 질문을 더하는 것이다. 배작가가 쓴 '무기가 되는 글쓰기'에는 다음과 같은 예화가 실려 있다.


3.


“우리 앞에 놓인 한 끼 식사를 위해 몇 명이 수고했을까요?”

스님이 물었다. 기껏해야 10명 정도겠지 생각했다. 처음 대답한 사람이 100명이라 말하자 나는 뜨끔 놀랐다. 다음 사람이 50명이라고 그랬고, 그 옆 사람이 10명이라고 했을 때 비로소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이 밥을 담는 그릇도, 참기름의 기름 한 방울도 생각한 인원수냐고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끼 식사를 위해 전 인류가 조금씩 기여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런 글을 읽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각, 즉 상상이란 걸 하게 된다. 또한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답하고자 하는 본능을 일깨운다. 그리고 만일 그 대답이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다면 공감을, 다르다면 반전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예화들이 저자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면 어떨까. 그 도입부는 독자들을 훨씬 더 큰 몰입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저자 소개를 읽은 후라면 어떨지 생각해보라.


4.


"대학 졸업 후 <뉴요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뉴욕 한복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사무실에서 승승장구를 꿈꾸며 커리어를 쌓아가던 어느 날, 암으로 투병하던 친형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는다. 이를 계기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무기력감에 빠진 끝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며 스스로를 놓아두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게 2008년 가을, 뉴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지자는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최소 여덟 시간씩 조용히 서서 수천 년의 시간이 담긴 고대 유물과 건축물들, 그리고 거장들이 남긴 경이로운 예술 작품들과 마주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물론 이런 경험이 저자만의 아주 독특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형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무력감에 빠지진 않는다. 또한 기존의 하던 일을 두고 전혀 엉뚱한 직업을 택하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게다가 그 직업이 미술관의 경비원이라니... 그러나 이런 남다른 선택과 경험이 독자로서는 더없이 좋은 읽을거리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과 의사인 김혜남이 쓴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도입부를 시작한다.


5.


마흔두 살에 불치병 중 하나인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딸로서, 아내로서, 맏며느리로서, 두 남매의 엄마로서, 의사로서, 교수로서 있는 힘껏 살아온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싶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고,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해야지 하면서 미뤄온 것들을 영영 할 수 없게 된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지금 그렇게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당신만 더 힘들어진다면 그 문제는 놓아 버리세요.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생각하세요.”


아마 이 이야기를 읽고 그냥 넘어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마흔 둘의 나이에 파킨슨병을 진단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가 마주한 누군가의 조언?이 주는 울림은 크다. 그런데 그 조언의 주인공이 바로 김혜남 작가 그 자신이라면 또 어떨까. 평소 작가는 앞날을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고난 앞에서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독자를 끌어들이는 스토리텔링 방식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6.


물론 도입부를 시작하기 위한 조언이나 아이디어는 글쓰기 관련 책을 조금만 읽어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질문으로 시작하라던가, 공감이나 자극으로 시작하라던가, 대화형이나 결론형으로 시작하라는 기계적은 조언은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책의 주제에 합당한 생생한 스토리 하나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데는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맥락이다. 주제와 상관없는 예화라면 그만큼 어리섞은 도입부도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내가 겪었던 경험들 속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단서를 찾기 위해 애를 써보라. 그것은 공들여 본문을 쓰는 것만큼의 충분한 값어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독자들을 내 책 속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무의미할 수 있다. 책과 글의 도입부에 이렇듯 공을 들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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