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의 기쁨과 슬픔 - #06
1.
제가 오랫동안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매일 술주정을 하시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듣던 얘기 또 듣고 또 듣는 일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간암으로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저는 알코올 향에 실려오는 누군가의 잔소리를 정말로 정말로 싫어합니다. 두 번째는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한때 크리스천은 왜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하는가를 두고 엄청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노력으로 내가(크리스천들이) 좀 더 정직했다면 지금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아질거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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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유는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 체질 탓입니다. 나도 모르게 과음하게 될까봐 조심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술은 제 삶의 윤활유이자 작은 기쁨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금요일 밤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 그것도 4캔에 12000원 하는 '쇼쿠사이'를 즐겨 마십니다. 거품이 많은데다 그 부드러움을 따라올 맥주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와이프는 기네스를 가장 좋아합니다. 역시나 음주를 즐기는 처제와 함께 기네스의 고향 아일랜드를 여행하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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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기네스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더군요. 기네스는 1759년, 버려진 양조장을 1년에 45파운드씩 9천 년간 임대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금 환율로 쳐도 8만원이 채 안되는 돈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아일랜드로 건너온 잉글랜드 사람이 만든 술이라는 겁니다. 이 두 나라는 사실상 우리나라와 일본과 비슷한 앙숙 관계입니다. 영연방 국가이지만 IRA라는 유명한 아일랜드 테러 단체가 있을 정도로 오랜 악연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로 치면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막걸리 브랜드를 만든 겁니다. 대충 어떤 관계일지 감이 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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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네스는 아일랜드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너진 성당을 세우고 최고의 직원 복지로 화답했죠. 그 결과 기네스는 이제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술이자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렇게 술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마시면 그 맛이 한층 더 나아지는건 저만 그런 것일까요? 최근 저는 와인에 대해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즐겨 마시는 '코디치'라는 이태리 와인은 9,900원 밖에 하지 않습니다. 아직 와인은 잘 모르지만 그 하나하나가 가진 스토리를 공부하며 와인을 배워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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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소주를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소주가 세계에서 가장 판매량이 많은 술이란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저도 나이를 먹고 자연스럽게 소주를 마시면서 어느 순간 아버지의 음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싸디 싼 소주 한 병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삶은 더욱 더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젓가락으로 밥상을 두드리며 사람들 앞에서 노래 한 자락을 뽑으실 때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전국노래자랑 예선에 도전하셨을까요. 그런 예술혼?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죄다 예술을 공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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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건강에 해로운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건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술은 어느새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거든요. 슬퍼도, 기뻐도 우리는 술을 마십니다. 그것도 함께 마십니다. 약간의 취기가 주는 행복감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 술 취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은 포도주, 즉 와인을 즐기셨죠. 술의 역사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적당히, 잘 마시는 지혜를 배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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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에게 술에 관한 '문화'가 있는지는 조금 생각해볼 대목입니다. 솔직히 말해 소주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입니다. 그러나 술의 본질도 취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술은 사람들의 희노애락, 그 어느 순간에도 함께하는 '동반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라이프스타일의 일부이기도 하죠. 만일 우리가 왜 술을 마시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 답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질거에요. 바로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술은 우리 삶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존재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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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좋은 술은 취하기 전에, 나쁜 술은 취한 후에 마시는 것이라는 조언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 존재 자체가 율법 그 자체인 분이 그런 말을 하셨다는게 놀랍기도 합니다. 굳이 제가 술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적인 얘기를 끌어온 이유는 술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함께 해봤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술을 마시지 말라는 율법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굳이'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에 의해 깨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원한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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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사케를 신주 단지 모시듯 하는 일본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부럽습니다. 분명 우리에게도 오랜 역사를 가진 술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을테니까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와 6.25 같은 전쟁을 겪으며 우리 술과 함께 어울림의 문화도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다행인 것은 다양한 우리 술들이 하나 둘씩 복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주도 희석식이 아닌 다양한 증류식 소주들이 등장하고 있고요. 오죽하면 외국인이 우리 술에 반해 '토끼소주'라는 브랜드를 새롭게 만들었을까요. 그러니 좀 더 다양한 술을, 적당히, 그리고 행복하게 마실 수 있는 브랜드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짧고 유한하니까요.